[감자의 460년 역사] ‘악마의 식물’이 우주식량으로 변하다
17~18C 유럽 "나병의 원인" "노예나 먹는 것" 기피
현대엔 웰빙·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

▲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 19세기 유럽 시골농가의 삶이 묻어난다.

아버지 찰스1세가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에 패해 처형당한 뒤 영국의 찰스2세(1660~1685)는 항상 의회의 눈치를 보며 재정 궁핍에 시달렸다. 보다못한 존 포스터(1664년 ‘대량의 감자 재배로 증가한 영국의 행복’이라는 책을 썼다)가 재테크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폐하, 전국에 감자를 재배하게 하고 감자세를 거두시죠.” 포스터는 감자가 식량부족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왕의 주머니도 두둑하게 채워줄 것이라고 부추겼으나 찰스 2세는 못마땅한 투로 내뱉었다. “나더러 그런 허접한 채소나 팔란 말이냐!” 훗날 감자가 인도와 미국으로 전파되어 연간 1000억달러 규모의 세계시장을 형성하리란 사실을 알았더라면 찰스 2세의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감자는 오늘날 밀, 쌀, 옥수수와 함께 세계 4대 작물로 성장했지만 역사적으로는 늘 지배층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고급요리의 재료가 아닌, 빈자(貧者)의 구황식물이어서 그랬을까? 1532년 스페인 탐험가 피사로(F. Pizzaro)가 안데스 산지에서 캐낸 이 강인한 작물을 유럽에 전했을 때 유럽인은 “노예가 먹는 비천한 음식”이라며 푸대접했다. 전통적으로 유럽인은 어두운 땅 속에서 자라는 감자를 불경한 것으로 여기기도 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북미대륙에서 건너온 고구마는 단맛을 탐닉한 귀족들이 즐겨 찾아 ‘높은 지위’를 누렸다. 선원 대신 피사로가 감자를 입에 물고 내렸더라면 감자의 인식이 달라졌을까? 유럽인은 땅 속에서 놀라운 속도로 뻗어나가는 감자줄기와 한 줄기에 50개 이상의 열매가 열려있는 모습을 보고 악마가 농간을 부린 것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17세기 초에는 ‘감자가 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1770년 대기근이 닥쳤을 때 나폴리 사람들은 북유럽에서 구호품으로 보내온 감자를 만지는 것조차 거부했다. 1774년 프러시아에서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기근 대책으로 감자를 심을 것을 명령해도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콜헤르크 지방 사람들은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개조차 맛이 없어 먹으려 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먹어야 한단 말입니까”하고 호소했다.

유럽에서 감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아일랜드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아일랜드인에게 감자는 주식인 귀리가 흉작이었을 때 목숨을 연명케 해준 구황식품이었다. 감자를 먹는다는 이유로 더더욱 아일랜드인을 깔보던 영국도 산업혁명 이후 감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밀농사만으로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많은 감자는 밀보다 두 배나 많은 인구를 먹일 수 있었다. 조리도 값비싼 오븐 대신 냄비 하나만 있으면 됐고, 빵을 굽는 것보다 연료비를 아낄 수 있었다. 산업혁명기의 도시빈민과 소작농에게는 연료도 큰 부담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감자는 차츰 유럽인의 주식(主食)으로 떠오르게 된다.

오늘날 유럽의 경제강국으로 급부상한 아일랜드는 감자로 역경을 이겨냈지만 감자로 인해 큰 아픔을 겪기도 했다. 1845년 9월 감자마름병이 아일랜드에 상륙한 뒤 5년간 감자의 90%가 썩어나가자 100만명이 넘는 사람이 굶어죽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이민을 떠난 수가 130만명에 이르렀고 그들이 미국에 건너가 또 하나의 개척사를 이룩했다. 케네디의 조상도 아일랜드 이민자였으니 감자가 없었다면 미국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미국서 상업적 이용에 성공

감자를 가장 성공적으로 이용한 나라는 미국이다.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감자요리인 매쉬드 포테이토, 프렌치 후라이, 포테이토칩 중에서 뒤의 두 가지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 프렌치 후라이는 프랑스가 원조격이지만 1차대전에 참전한 미군 병사들이 맛본 뒤로 미국 음식이 됐다. 맥도날드 햄버거는 프렌치 후라이를 만드는 데 연간 140만톤의 감자를 쓰고 있다.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찾아간 개척민에게 감자는 딱 맞는 작물이었다. 씨만 뿌려놓고 몇 달 후 돌아오면 주렁주렁 열려 있어 반유목생활에 적합했다. 찧거나 가루로 만드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삶거나 구워 먹을 수 있어 편했다. 1613년 남미에서 버뮤다로 전파된 감자는 18세기 초까지 미국 전역에 급속히 퍼져나갔다. 조지 워싱턴은 1767년 자신의 농장에 감자를 심었으며, 토머스 제퍼슨은 1794년 농업 전문지에 감자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감자는 병사들의 식량으로 독립전쟁에도 기여했다. 1차대전 때 미군은 독일군의 주식량원인 감자밭을 초토화함으로써 전쟁을 빨리 종식시킬 수 있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이 1995년 우주식량으로 착안한 작물도 감자였다. 무중력 상태에서 물만 뿌려줘도 감자는 잘 자랐다. 감자 육종에도 적극적이어서 크고 매끈한 아이다호의 ‘러셋 감자’를 세계적 브랜드로 키웠다. 우리나라 감자의 대종을 이루는 ‘남작’과 ‘수미’도 미국 품종이다.

감자가 아시아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말이다. 1598년 자카르타항을 경유한 네덜란드 배가 일본 나가사키에 상륙해 감자를 전했다. 중국에는 그보다 늦은 18세기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에는 19세기 초에 들어왔는데,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순조 갑신·을유(1824~1825) 양년 사이 명천(明川)의 김씨가 북쪽에서 종자를 가지고 왔다”는 설과 “청나라 심마니가 인삼밭에 심어 놓았던 것이 전파되었다”는 설이 있음을 기록해 놓았다.

유럽에서와 달리 흉년이 들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했던 우리나라에서야 감자가 아무 저항없이 뿌리내렸다. 탐관오리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은 산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었는데,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감자가 제격이었다. 쌀 수탈이 극심했던 일제 강점기에도 감자는 관헌이 눈독 들이지 않는 농민의 주식이었다.

FAO(유엔식량농업기구) 2001년 통계에 따르면 세계 감자 생산량은 3억1000만톤이며 130개국에서 재배하고 있다. 소련 붕괴 이후 세계 감자 생산량의 20%를 담당하는 중국이 1위로 올라섰고 러시아, 미국, 인도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연간 70만톤을 재배하고 있으며 북한은 우리 2배가 넘는 187만톤을 생산하고 있다.

허만갑 주간조선 기자(mghuh@chosun.com)
※본 기사 작성에는 김승욱(kswforever@freechal.com)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


 

[감자혁명의 의미] 우리 농업에 쏟아진 ‘단비’
강원도 감자 생산량 ‘제자리 걸음’… 청정산골 씨감자, 식탁혁명 일으킬 것

감자는 벼, 콩, 보리, 옥수수와 함께 국가관리식량 5대 작물이다. 국내의 감자 생산량은 2004년 64만2000톤으로 강원도가 29%, 제주도가 15%, 나머지 지역이 56%를 생산한다. 최근 감자가 계란, 우유, 시금치와 함께 4대 웰빙식품으로 인식되면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농업경제연구원은 2012년에는 78만7000톤이 필요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2004년 우리나라 농부는 3만3517톤의 씨감자를 필요로 했으나 강원도에서 겨우 7709톤을 생산해 결국 2만5808톤의 부족분은 불량 비규격 품종으로 채워야 했다. 이런 시점에서 괴산군의 씨감자 양산계획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최근 강원도 대관령의 씨감자 채종지역은 100년 넘은 연작농사로 토양 균의 밀도가 증가해 무병 씨감자를 집중 사용하고 방제소독비를 높여도 생산량이 늘지 않는 기현상이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집중호우로 경사지의 토양유실이 심하여 토지비옥도가 크게 떨어지고 있어 향후 생산량을 높이기 곤란한 여건이다. 여름철의 고온, 장마, 태풍에 의한 피해가 크고 이를 막기 위한 농약 사용 횟수가 많은 것도 단점이다.

그에 비해 괴산군은 개발이 안된 탓에 공해가 없고 감자에 필요한 영양소가 가득한 청정산골이다. 지대가 높고 일교차가 커서 감자 재배지로 이상적이다. 해마다 큰 기상재해 없이 지나가는 안정지역으로 환경에 의한 감자전분 변화가 거의 없다. 괴산군에서는 3월 초에 감자를 파종하여 6월 말에 수확하므로 7월 장마를 피할 수 있다.

▲ 집중호우가 내린 강원도 홍천군의 씨감자밭. 강원도는 해마다 장마와 태풍의 피해로 감자 생산량이 급감하고 있다. /조선일보DB사진

정부는 이제 씨감자 재배지로 대관령을 포기하고 2000억원을 투자하여 강원도 감자 원종장을 강릉으로 옮기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나 그보다 적은 비용으로 괴산군에 원종장 시설을 갖추면 몇 배의 효과를 낼 수 있다.

한편 제주도는 우리나라 최대의 감자 생산지역 중 하나이지만 작토층이 얇아서 뿌리 발달이 좋은 ‘대지’ 품종 위주로 재배하는 취약점이 있고, 알칼리성 화산회토 토양이라 표면이 울퉁불퉁한 더뎅이병에 걸린 감자를 생산할 수밖에 없는, 불리한 환경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또한 괴산군은 씨감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경기·충청·전라·경상도 지역과 모두 가까워 물류비용을 줄일 수 있다. 무엇보다 ‘바이오 씨감자’라 명명한 신품종은 농약이 거의 필요치 않으므로 웰빙 식탁을 꿈꾸는 도시인의 호응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출하시기에 있어서도 괴산감자는 10~12월과 12~3월에 수확함으로써 12~1월에 출하하는 제주감자, 9~10월에 출하되는 강원감자 사이의 틈새시장을 노릴 수 있다. 현재 강원도의 환경조건은 가을 씨감자를 사용하지 못하고 다음해 봄 씨감자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 감자재배 농가가 가을에 파종해 초겨울 시장을 확보하려고 해도 힘든 실정이다. 괴산군에서 가을용 씨감자(7월 중순에 파종해 10월 중순에 수확)를 생산하여 공급한다면 감자 영농시장에 경쟁적으로 뛰어들 수 있다.


박종섭 충북대학교 농업경제학과 교수




 

‘감자혁명’의 주역 정우춘 연구사 “농민이 부자 되는 게 꿈이에요”
초기연구비 1년 450만원
연구도우미로 고생한 아내, 실험실서 먹고 잔 아이들에게 미안해

▲ 건강한 씨감자를 들어 보이는 정우춘씨. / 주간조선 이상선

“우량 씨감자만 만들면 괴산 농민이 다 부자가 될 거라 믿었습니다.” 정우춘씨가 힘겨운 육종연구에 뛰어들었을 때 주변사람은 대부분 말렸다. 처음에 격려했던 이들도 부인까지 실험실에 끌어들여 고생시키자 고개를 돌렸다. “그런다고 돈이 되니 승진을 하니? 식구들 고생 그만시켜라”고 했다. 그러나 불량 씨감자를 심었다가 1년 농사를 망치고 주저앉는 농민을 지켜보기란 더 힘들었다. 가난을 대물림한 농민은 그의 아버지, 형제, 이웃이었다. 학문적 오기도 솟구쳤다.

그러나 돈과 인력이 없었다. 초기 사업비로 타낸 4200만원은 150평짜리 씨감자 생산시설을 만드는 데 다 썼다. 1년에 450만원의 연구비로는 실험도구 살 돈도 빠듯했다. 보조연구원도 하나 없어 결혼 1년 된 부인 김명숙(35)씨가 도우미로 나섰다. 바이러스를 검증하는 날이면 신혼부부는 실험실에서 밤을 새웠다. 젖도 안 뗀 큰 딸 선하는 거의 실험실에서 먹고 잤다.

청천면에 있는 부친 정우구(83)씨의 700평 감자밭에는 64개 품종의 연구용 감자가 해마다 64가지 색깔의 꽃을 피웠지만 그 중 희망의 꽃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눈 내리는 겨울, 비닐로 얼기설기 만든 양육 재배장이 무너질까봐 밤새도록 비닐 위의 눈을 쓸어냈다. 그 와중에 둘째와 셋째를 낳았다. 차가운 실험실에서 키운 아이들은 병약했고 둘째 딸 윤하는 아토피성 피부염을 심하게 앓았다. ‘아토피감자’는 다섯 살짜리 윤하를 위해서 만든 작품이다.

2002년 마침내 자체개발한 씨감자를 농민에게 나눠주었다. 그 감자는 대풍으로 이어졌다. “칠성면의 농민 400여명이 거의 다 찾아와 일일이 고맙다고 악수를 청했을 때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그것으로 고난의 결실을 맺는 줄 알았다. ‘정우춘씨의 씨감자는 웰빙감자’로 이름이 나면서 농민의 보급 요구는 더 늘어났다. 그러나 재투자만 이어지면 양산이 가능한데도 더이상의 지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정씨는 허탈감에 빠졌다.

연구 포기하려 할 때 가치 인정받아

언제부턴가 아버지가 연구실 근처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아내도 나앉았다. “내년이면 큰 애가 학교 들어가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냐”며 울먹였다. 실의에 잠긴 정씨에게 다른 연구소에서 이직 제의가 들어왔다.

8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가? 갈등에 빠져있을 때 김경용 부군수가 부임했다. 충북도청 감사관으로 일했던 신임 부군수는 씨감자 연구의 가치를 즉파했다. “물고기가 마침내 물을 만난 느낌이었어요.” 정씨는 부군수와 얘기를 나누면서 다시 희망을 얻기 시작했다. 때마침 현정부가 각 시군별로 신활력사업 안건을 모집했고, 괴산군은 씨감자 연구를 사업건으로 채택했다. 부군수는 도청에 보낼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 의미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정우춘씨는 이제 초조하지 않다. 여전히 밤 11시에 퇴근하고 4일에 한 번 밤을 새지만 팀원이 7명으로 늘어나 외롭지 않다.

부군수와 가끔 의견 충돌을 빚는데 씨감자 보급단가가 그 한 예다. “이것도 사업인데 1박스당 2만원씩은 받아야 하지 않느냐. 질 나쁜 씨감자도 3만5000원이다”는 부군수의 제안에 정우춘씨는 주억거리기만 했다. “농민이 무슨 돈이 있습니까? 1만7000원쯤으로 하죠.” 결국 바이오씨감자는 최고의 품질에 최저의 가격을 갖춘 종자가 되었다.


괴산=허만갑 주간조선 기자(mghuh@chosun.com)



 

[조용한 감자혁명] 감자의 역사, 괴산(槐山)이 다시 쓴다

▲ 괴산군 농협기술센터에서 개발한 포도맛 감자와 고구마맛 감자

아삭아삭 사과처럼 즉석에서 깎아먹는 감자가 나온다면 어떨까? 겉은 감자인데 삶은 밤 맛이 난다면 잘 팔리지 않을까? 아린 맛을 제거해 과일처럼 먹을 수 있고, 전분을 강화해 단맛이 나는 미래형 최첨단 감자가 지금 충청북도 괴산(槐山)의 산골 오지에서 자라고 있다. 뿐만 아니다. 보랏빛 속살에 포도맛이 나는 감자, 붉은 껍질에 고구마맛이 나는 감자, 칼슘처럼 인체에 필요한 특정 성분을 강화한 감자가 식탁에 오를 날을 기다리며 실험실 안에서 새 혈통을 다듬고 있다. ‘바이오 감자’라는 이름으로 괴산군 농업기술센터에서 개발한 이 감자들은 바이러스 함유율이 정부 보급종 씨감자보다 4배나 낮은, 퇴화율 1%의 ‘웰빙감자’이기도 하다.

미래형 감자로 ‘농업혁명’을 꿈꾸는 괴산 농업기술센터는 최근 정부로부터 ‘바이오씨감자 연구센터’ 건립에 필요한 120억원(국비 90억원, 지방비 30억원)의 개발비 투자를 이끌어낸 감자 연구의 새 요람이다. “미래형 감자들은 품종개발이 완료된 상태지만 순도를 더 높이는 2년간의 유전자 고정기간을 거쳐 2007년쯤 출하할 계획입니다. 사실 지금은 더 급한 일에 전력을 쏟고 있습니다.” 바이오감자 개발의 주역인 정우춘(40) 지도사가 말했다. 급한 일? 정부 보급종의 기준에 맞는 우량 씨감자의 대량생산을 말한다.

“새 품종 개발도 중요하지만 바이러스가 없는 무병 씨감자의 양산(量産)이야말로 바이오 씨감자 사업의 핵심이자 정부의 투자 목적입니다.” 정우춘씨는 2004년 ‘분무식 양액재배 씨감자 대량생산방식’을 개발

해 특허를 획득했다. 씨감자란 무균재배한 감자의 종자(種子)다. 괴산군은 2007년까지 2200평의 양액재배 시설과 440ha의 원종채종포를 완공하여 연간 200만개, 9600톤의 무병 씨감자를 생산해냄으로써 고질적인 씨감자 부족현상을 해결하고 친환경 감자농법의 혁명을 일으킬 계획이다. 9600톤이면 2004년에 강원도가 생산한 7709톤보다 많은 양. 바야흐로 괴산군이 새로운 ‘감자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전분 많아 밤처럼 맛있고 크고 무거워

▲ 양육재배장으로 가기 전의 씨감자 순화과정 / 주간조선 이상선

감자 하면 으레 강원도를 떠올리지만 오늘날 강원도의 감자 생산력은 예전같지 않다. 2003년과 2004년 우리나라 감자 재배농가에 필요한 씨감자의 양은 각각 3만3370톤과 3만3517톤. 그러나 강원도 대관령의 감자 원종장에서 생산한 정부 보급종 씨감자는 그 20%인 9010톤과 7709톤에 불과했다. 결국 감자 재배 농민들은 나머지 80%를 비규격의 불량 씨감자로 구입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바이러스 허용치 기준을 초과한 비규격 씨감자는 병충해에 약해 생산량 감소로 이어져 농가소득에 큰 타격을 주어왔다.

씨감자 부족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감자가 최근 ‘웰빙식품’으로 떠오르며 수요는 늘어나는 데 반해 공급은 거꾸로 감소하고 있기 때문. 감자는 강원도와 제주도로 생산지가 편중된 데다, 강원도는 이미 100년이 넘는 연작의 피해로 지력이 떨어지고 매미를 비롯한 큰 태풍이 매년 휩쓸고 지나가면서 생산량이 급감하고 있다. 해결책을 고심하던 정부는 원종장을 대관령에서 강릉으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2000억원의 비용이 드는 데다 강릉으로 옮긴다 해도 당장 우량 씨감자를 양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괴산군이 개발한 바이오 씨감자의 양산방식은 강원도 씨감자보다 20배 생산성이 높고 바이러스 함유율은 4배나 낮은 신기술. 그 핵심은 5단계(기본종→기본식물→원원종→원종→보급종)를 거치는 기존의 씨감자 생산방법을 3단계(기본종→원종→보급종)로 줄인 데 있다.<그래픽 참고>

“그러나 증식단계를 줄이면서도 최종 씨감자 생산량을 같은 수준으로 유지하려면 기본종 자체의 수가 많아야 하는데, 그를 위해 위기상황을 조성함으로써 감자의 종족보존 유전자를 자극했죠.” 모든 생물은 죽음이 임박하면 본능적으로 번식을 시도한다. 잡초는 환경이 나빠지면 계절에 상관없이 씨앗을 만들고, 난도 베란다에 내놓아서 춥게 만들면 꽃을 피운다. “그런 가정 아래 감자에 미량의 황산과 코마린(coumarin:광합성 전류를 차단해 식물에 해를 입히는 물질)을 배합해서 뿌려보았더니 놀랍게도 복지(腹支:감자가 열리는 땅속줄기)의 마디(마디마다 한 알씩 열린다)가 무수히 늘어났다”고 정우춘씨는 말했다.

괴산군의 분무식 씨감자 양액 재배장치는 20~30g 규격의 씨감자를 포기당 30여개나 수확할 수 있는 것으로, 7g 이하의 비규격까지 합하면 총 생산량은 기존 씨감자 생산법의 20배가 넘는 500개에 달한다. 300평에 씨감자를 심었을 때 정부보급종은 3톤, 괴산 씨감자는 3.4톤이 소출된다. 전국적으로 따지면 엄청난 양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발병률이 낮으면 그만큼 농약이 필요없어 결국 무공해 유기농재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씨감자 부족현실 극복

▲ 주렁주렁 매달린 씨감자 / 주간조선 이상선

정우춘씨가 처음부터 감자를 연구한 것은 아니었다. 충북대 농학과와 대학원 석사 과정에서 인삼을 전공했고 1997년에 농업기술센터에 들어왔을 때 처음 맡은 임무는 난(蘭)의 조직배양이었다. 그러나 괴산의 농민들은 감자를 원했다. 씨감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괴산의 씨감자 수요량만 600톤인데 구입 가능한 정부보급종이 겨우 146톤이라 부족한 454톤을 질이 떨어지는 비규격 품종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결국 농민은 정부 보급종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불량 씨감자를 사서 심으면서도 그마저도 구하기 힘들어 20㎏들이 한 상자에 2만원인 보급종보다 비싼 3만2000원에 사고 있었다.

농민들이 괴산의 특산물로 익히 알려져온 고추보다 감자를 원하는 이유는 수요급증으로 감자 가격이 높은 데다 재배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감자는 100일 농사라 수확이 빠르고 잔병이 없고 손이 덜 가서 노동력이 약한 노인이 재배하기에 적합한 작물입니다.” 3만9500명의 주민이 사는 괴산군은 65세 이상 노인이 22.7%, 즉 4명 중 1명을 차지하는 초고령 사회다. 일손이 많이 가는 고추는 노인이 재배하기에 버거운 작물이다. 더구나 중국산 고춧가루가 수입되면서 고추농사 재미도 예전같지 않았다. 반면 전분 외에는 현물 수입이 어려운 감자는 90% 국산만 유통된다.

“그래, 질 좋은 씨감자를 만들어보자!” 결심은 했지만 연구환경은 열악하기만 했다. 식물의 세포벽을 제거하고 원형질체를 융합시켜 새 교잡종을 얻으려면 전기 자극세포융합장치(plant protoplast)라는 기계가 있어야 하는데 이 기계 한 대가 4000만원이었다.(씨감자 개발착수비가 4200만원이었다.) 하는 수 없이 50볼트 어댑터와 각종 코일을 붙여서 만든 조잡한 전기충격장치로 세포핵을 붙이는 원시적인 수작업을 시도했다.

또 ‘아그로박테리움’이라는 유전전달 효소를 이용해 두 감자세포 핵 속의 유전자 정보를 전이시켜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 효소는 시약값만 400만원이라 엄두를 낼 수 없었다.(정씨의 1년 연구비가 600만원이다. 강원도 감자 원종장에선 1인당 연 1억원의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다.) 대신 한 봉지에 8000원 하는 ‘3% 포도당액’을 샀다. 묽은 포도당 속에 잘게 썬 두 종류의 감자잎을 넣으면 세포벽이 쪼그라들어 부서지면서 세포핵이 튀어나가 돌아다니다가 운 좋으면 융합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5만~6만번 실패 반복한 결과

▲ 우량씨감자묘 선발 모습 / 주간조선 이상선

그런 식으로 8년을 매달린 끝에 2002년, 기존 농가에서 재배되고 있던 감자품종 ‘수미’ ‘남작’ ‘추백’ 등의 개량품종을 만들었다. 3100가구의 농가가 개량 품종을 요청했지만 씨감자가 모자라 400여 농가만 일단 보급했다. 3개월 후 수확 결과는 대성공. 괴산군 칠성면의 감자 재배농가는 가락동 농수산시장에서 20㎏박스당 2000원 정도 더 높은 경매가를 올렸다. 소문을 들은 서울의 아파트 부녀회가 버스를 빌려서 밭떼기로 사가기도 했다. 식품대기업 N사에서 독점계약을 맺자는 제안이 들어왔지만 물량이 모자라 계약할 수 없었다.

“육종은 원래 ‘백사장에서 사금 캐기’라고 하는데, 시설도 시약도 없는 제겐 ‘사하라 사막에서 사금 캐는 격’이었습니다. 5만~6만번의 실패를 반복했지 싶어요. 원하는 감자가 나올 확률은 극히 희박합니다. 가령 맛이 좋은 ‘남작’과 껍질이 얇은 ‘수미’를 융합시키면 맛도 좋고 껍질도 매끄러운 감자가 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해괴망측한 종이 돌출되는 식이죠.”

미래형 감자는 개량감자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얻어진 산물이다. 역시 2종(種) 혹은 4종의 감자 유전인자 교배 끝에 탄생했다. 80%의 개발단계에 있는 ‘아토피 예방 감자’는 관심을 끄는 품종이다. 솔라닌 독성이 없고 비타민C가 일반 감자의 1.7배나 된다는 이 감자는 차후 생명공학연구소의 위해성 검사를 통과하면 상품화할 계획이다.
정우춘씨의 업적은 놀랄 만하다. 무병 씨감자를 만들고, 미래형 감자를 개발했으며, 그 감자들을 대량생산하여 농가에 싸게 보급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묵묵히 일해온 한 연구자가 괴산의 운명과 한국 농업의 미래를 바꾸고 있다.

괴산=허만갑 주간조선 기자(mghuh@chosun.com)


 
[조용한 감자혁명] 감자의 역사, 괴산(槐山)이 다시 쓴다
필수영양소 거의 다 들어있는 ‘웰빙식품’

오늘날 감자는 웰빙식품으로 재조명 받고 있다. 감자는 인체에 필요한 필수영양소가 거의 다 들어 있다. 4대 작물 중 유일하게 알칼리성이라 육류, 유제품과 잘 어울린다. 감자 한 덩어리에는 수분 75%, 녹말 13∼20%, 단백질 1.5∼2.6%, 무기질 0.6∼1%, 환원당 0.03㎎, 비타민 C 10~30㎎이 들어있다. 밀가루보다 필수 아미노산이 더 많이 함유되어 있다.

특히 감자에는 비타민C가 100g당 23㎎이나 들어있어 감자 2개면 성인 1일 요구량 50㎎을 충족시킬 수 있다. 감자의 전분이 비타민C를 보호하기 때문에 가열해도 거의 파괴되지 않는다.

감자의 식이섬유에는 지방과 당질의 흡수를 방해하는 성분이 포함돼 있어 혈중 콜레스테롤과 혈당 수치를 낮추는 효과가 있다. 100g당 열량은 72㎈로 같은 양의 쌀밥 145㎈의 절반에 불과해 다이어트 식품으로 그만이다. 탄수화물의 결정체로 소화가 잘 돼 과식해도 배탈이 안 난다.



Page | 1 | 2 |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