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2

 

 

 

약사

연표

인물1

지명연혁

지명유래

전설

 

 춘천의 인물


 

 Bullets008.gif독립운동시기

    *가나다순

 

circle03_darkblue.gif 김경달(金敬達)

 

   1849(철종 1)∼896(고종 건양 1). 한말 의병장으로 춘천 신동면(新東面, 혹은 남면 가정리) 출신으로, 이명(異名)은 경달(璥達)·현실(顯實)이다. 원래 춘천부의 포군(砲軍)으로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여 동리에서 '김효자'라고 불렸다. 1895년 8월(음)을미사변이 발생하고 11월(음) 단발령이 내려지자 다음해인 1896년 1월(양) 유중락(柳重洛)·유중악(柳重岳)·이만응(李晩應)·유홍석(柳弘錫) 등을 중심으로 이소응(李昭應)을 대장으로 추대한 춘천의진이 형성되었다. 이에 김경달은 유중악 의병모집소에 소속되어 포군으로 활약하였다.

 

   그후 그는 최삼여(崔三汝)의 지평(砥平)의진으로 들어갔는데, 동학군 진압 당시 맹영재(孟英在)의 부하였던 최삼여가 1896년 3월 홍천에서 의병을 거느리고 지평으로 가서 지평현감으로 있는 맹영재를 위협 설득하고, 함께 의병을 일으켜 양근(楊根)땅 미원(迷源)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경군(京軍)을 만나 접전을 벌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군사가 흩어졌다. 이 싸움에서 맹영재가 전사하자 그의 아들 맹일호(孟一鎬)가 기의를 설유한 최삼여를 원망하여 죽이고 의병진의 활동을 저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끝까지 싸우다가 경군에게 생포되었다. 김경달은 경군의 회유를 크게 꾸짖고 총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1980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김우천(金祐天)

 

   1872(고종 9)∼?  춘천 서면 안보리(安保里) 출신으로 일명 이숙(理淑)이다. 그는 이인선(李仁善)이 독립자금조달에 종사하는 애국지사 김세동(金世東)을 안전지대에 도피시켜 주기를 간청하자 춘천의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1919년 5월 29일부터 동년 6월 3일까지 숨겨 주었다. 이 사실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동년 8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본래 김세동은 경북 안동군 서후면 금계리(西後面 金溪里) 사람으로 1919년 3월 13일(음 2월 14일) 정관식(鄭寬植)으로부터 시국을 개탄하던 중 강화회의(세계1차대전후 처리문제 논의)가 개회중인 프랑스 빠리로 함께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의논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부호인 김봉경의 집으로 찾아가서 필요한 자금 4천원을 요구하였으나, 결국 1천원 만을 제공받고 우선 미국으로 출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경에 탐지되자, 이인선으로부터 은신해 주기를 부탁받고 김세동을 경성부 연지동의 윤병덕(尹炳德)의 집에 숙박시킨 후 다음날 동소문 박씨 집으로 데리고 가서 숨겨 주었다가 다시 자기집(춘천 서면)으로 옮겨 숨겨 주었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김유정(金裕貞)

 

   1908(순종 융희 2)-1937. 춘천 신동면 증리(甑里) 출신, 부호인 김춘식(金春植)의 2남6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현 연세대)을 중퇴하였다. 그는 1932년(24세) 향리인 실레마을에 금병의숙(金屛義塾)을 세워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고, 협동조합·농우회·노인회·부인회 등을 조직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으며, 한때는 금광에 손을 대기도 하였다. 1935년 단편소설 『소낙비』·『노다지』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1등과 가작으로 입선, 문단에 등장하여 구인회(九人會)의 일원으로 이상(李箱) 등과 교분을 가지면서 창작활동을 하였다.

 

   그후 1936년에 『산골나그네』·『봄과 따라지』·『동백꽃』 등과 1937년에는 『땡볕』『따라지』 등의 작품을 계속 발표하였고 서민정신을 표현한 농민문학·농촌문학을 이룩한 문인으로서 짧은 작가생활을 통하여 이룩한 30편 내외의 단편과 1편의 미완성장편소설 그리고 1편의 번역소설을 남긴 소설가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지병인 폐결핵과 치루(치질)가 악화되어 요양 중이던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성산곡리 다섯째 누이 집에서 1937년 3월 29일에 요절(29세)하였다. 그의 작품집으로는 1938년에 나온 『동백꽃』이 있고, 1968년에 출간된 『김유정전집』은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겨 놓았다.

 

    Bullets021_1.gif김유정문학촌

 

circle03_darkblue.gif 김인순(金仁順)

 

   1920∼? 춘천 대성정(大成町, 현 校洞) 출신으로 춘천농업학교 재학 당시 1937년 11월 이준환(李俊桓)·김시묵(金時默)·김창경(金昌卿)·반영균(潘榮均) 등 재학생이 조직한 항일비밀결사인 교내 독서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회원(40여명)들은 민족의 교양서적인 『흙』·『상록수』·『조선의 현재와 장래』 등의 독서를 통하여 토론과 독후감도 발표하면서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였다. 또 1938년 12월에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로 찾아가 독립운동가이며 고승(高僧)인 이종욱(李鍾郁)으로부터 민족의 진로를 교시받기도 하여 격조높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40년 10월 이준환·김시묵에게 회원들이 서명하여 졸업기념으로 준 태극기가 발각되어 마침내 독서회의 조직이 밝혀지게 되었고, 이와 관련한 김인순은 1941년 2월 8일 퇴학처분을 당했으며, 그후 독서회에 연루된 졸업 회원동지 모두가 검거되었다. 이때 김인순(당 22세)도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942년 10월 21일 경성지방 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4년형을 받았다.

 

 

circle03_darkblue.gif 김정삼(金正三)

 

   ?∼1907(순종 융희 1). 춘천 북산외면 청평리(淸坪里, 현 북산면 청평리)사람이다. 1907년 8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 병사들이 봉기하였다. 이때 그는 의병을 모아 합세하고 스스로 총독장(總督將)이 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동년 9월 7일 김정삼은 이성신(李星信)을 도령장(都領將)으로 삼아 의병 6백여명을 거느리고 홍천에서 일본군 51연대 경택(境澤)대위의 1개소대와 3시간동안 접전을 벌여 적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그후 계속하여 인제·양구 등지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1907년 11월 양구군 선안리(善安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야간 기습을 받아 혈전 끝에 전사하였다.

   정부에서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김조길(金祚吉)

 

   1880(고종 17)∼1946. 춘천 가연리(佳淵里, 현 낙원동) 사람이다. 그는 서울의 송춘근(宋春根)과 사전에 협의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1919년 11월 29일 그에게로부터 선언서(宣言書), 독립문서(獨立文書), 독립운동가(獨立運動歌),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축하문(大韓民國臨時政府 成立祝賀文) 등 4통의 문서를 1개 뭉치로 한 500뭉치를 송부받았다. 그는 동월 29일과 30일 사이에 춘천면의 이동화(李東華)에게 문서 7뭉치를 전달하고, 이동화는 이를 면내(面內)의 김민수(金敏秀)·엄중환(嚴中煥)·지달원(池達源)·김광호(金光鎬)·홍종숙(洪鍾肅) 등에게 각각 문서 한 뭉치씩을 배포케 함으로써 군중을 고무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고취하였다. 마침내 그는 동년 12월 21일 피체되었는데, 체포 전에 배포하고 남은 문서를 밀감상자에 넣어 온돌방 고래 속에 숨겨두고 있었다. 이에 김조길(당 41세)은 1920년 10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 처벌령으로 징역 1년형의 언도를 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11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마도현(馬道賢)

 

   1882(고종 19)∼1951. 춘천 북산면 사람이다. 부친 마정삼(馬正三)이 춘천일대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다가 1907년 일본군에게 총살당한 후 부친이 사용하던 화승총 7정을 집안 깊숙히 숨겨 놓고 부친의 유한(遺恨)을 풀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던 중에 1908년 피체되어 순국한 박영관(朴永寬)의 아들 박순구(朴順九)와 의기투합하여 함께 항일투쟁에 나서기로 맹약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동생인 마만봉(馬萬奉), 외사촌인 안이순(安二淳)·안삼순(安三淳)·안귀봉(安貴鳳) 3형제, 인척인 전봉학(全鳳學)등을 가담시켜 총원 12명으로 장총단(長銃團)을 구성하고 화승총과 사냥총으로 무장하여, 1912년 전후 19회에 걸쳐 홍천·춘천·인제·양구 등지의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는 동시에 일경을 사살 처치하였으며, 1924년부터는 부호층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 혹은 징수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7년 11월 일제의 대규모 포위 수색작전으로 전원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1928년 10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3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3년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마정삼(馬正三)

 

   1857(고종 8)∼1907(순종 융희 1). 춘천 북산면 사람으로 일명 용기(龍起·龍奇)이 다. 그는 1896년 2월 충북 제천(堤川)에서 기의한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참진(參陳)하여 분장(分長)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1906년 10월 병오의병 당시 강원도 춘천지방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7년 강원도 인제에서 일본군에게 피체된 그는 마침내 동년 7월 15일(음 6. 6.)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斗村面)에서 일본군에게 총살당하여 순국하였다. 그 후 그의 아들 마도현·마뇌병(馬雷炳)·마만병(馬萬奉) 등 3형제는 순국한 부친의 유한(遺恨)을 풀기 위하여 무려 10년동안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15년에서 5년까지의 옥고를 치렀다(1928년도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 기사).

   정부에서는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박선명(朴善明)

 

   1885(고종 22)∼1933. 춘천 남면 수동리(壽洞里) 출신, 일명 종근(鍾根), 자는 양보(良甫), 농업에 종사하면서 포수생활도 하였다. 정미의병 당시 1907년 9월 유홍석의 춘천의진에 참가하여 막료장(幕僚將)으로서 춘천·홍천 등지에서 싸웠으나 패하였고, 다시 남면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의병 6백여명을 모아 화약과 탄환을 만들어, 가평 주길리 일대의 일군과 혈전을 버린 유홍석 의병진과 더불어 항전하였으나 패하였다. 이 싸움에서 유홍석이 잔여의병을 김노수(金魯洙)의병진에 맡기고 박장호 의병진에 들어갔다가 제천 장담리(長潭里)에 머물게 되자 박선명은 지용기(池龍起)·최영석(崔永錫)·박운선(朴雲善) 등과 합께 의병 3백여명을 소모하고 스스로 총대장이 되어 가평을 본거지로 춘천·지평(砥坪)일대에서 활약하였다. 특히 누차에 걸쳐 경춘간의 전선을 절단하고 우편물을 탈취하여 각지에서 일본인을 공격하였으며, 그 후에도 춘천·양구·화천일대에서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일본측 기록 『폭도사편집자료』는 1908년 7월 가평 수비대에 귀순하였다고 하나 분명치 않다.

 

 

circle03_darkblue.gif 박순교(朴順交)

 

   생몰년 미상. 춘천 북산면 조교리(照橋里) 사람이다. 1919년 3·1만세 운동이 전해지자 춘천의 만세시위 계획은 춘천 천도교의 봉훈(奉訓) 윤도순(尹道淳, 동면 감정리), 교구장 이준용(李俊容, 서면 방동리) 등이 3월 중순부터 추진하였다. 그러나 윤도순(농업, 60세)이 각지를 돌아다니면 민중을 계몽하다가 체포되어 추진이 잠시 중단되었다. 이에 박순교는 이준용·허기준(許基俊, 동면 장학리)과 다시 협의하여 춘천읍 장날인 3월 28에 시위일자를 결정하고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드디어 28일 박순교 등은 태극기를 감추어 장터로 들어가서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수십명의 군중이 호응하는 가운데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때 장터를 경계하던 헌병보조원 허현(許鉉)이 총을 버리고 시위군중의 대열에 가담하였으나 마침내 수비대에 의하여 박순교 등이 모두가 체포되었고, 동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11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22일 경성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박우홍(朴禹弘)

 

   1916∼? 춘천 신북면 율문리(栗文里) 출신으로 1936년 3월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춘천군 북산면 서기, 1938년 1월 춘천고보의 동창인 신영철·이홍채(李鴻采)·이종식(李鍾植) 등과 같이 민족의식과 민족문화연구에 공감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규합하여 민족주의 사상을 앙양하는 등 민족운동을 고취시켰다. 이로 인하여 그는 체포되었고, 1940년 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종식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박화지(朴華芝)

 

   ?∼1907(고종 융희 1). 춘천 남면 후동리 출신이다. 정미의병 당시 1907년 8월 유홍석·유영석·유제곤·박선명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의거하였다. 이들은 약 6백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춘천 진병산과 가평 주길리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유영석이 전사하는 등 패전하였다. 이같이 유홍석의 춘천의진이 패하여 의병이 흩어지자 박화지는 집에 돌아와 숨어 있었는데 일본군이 부락을 급습하여 무고한 주민을 잡아다가 '박화지의 거처를 알려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으므로 그는 동리와 의병, 주민의 안전을 위하여 일군 앞에 스스로 나아가 체포되었다. 그는 갖은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의기를 지키다가 끝내 일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석오석(石五錫)

 

   ?∼1907. 춘천시 서하면(현 西面) 출신이다. 정미의병 당시 1907년 9월이래 박선명이 의병을 일으켜 춘천·홍천·가평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최유천(崔有天, 춘천 북면)이 향리에서 봉기하여 춘천·화천·양구·인제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에 석오석은 그들과 더불어 항일의병에 참여하여 각지에서 활동하고 일시 귀향하고 있을 때 체포되어 몇 일 후 1907년 11월 28일 그는 정기공(鄭基公)과 같이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성익현(成益鉉)

 

   생몰년 미상. 춘천 출신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춘천 진어영(鎭禦營)의 초관(哨官, 종9품)을 역임하였고, 군제개편과정에서 실직한 진위대(鎭衛隊) 춘천분견소(春川分遣所)에 소속되기 직전의 군인이었다. 1895년 을미개혁·을미사변·단발령 실시 등으로 을미의병의 봉기가 확산되자, 1896년 1월 춘천에서도 유생(儒生)을 중심으로 농민·상인·군인·포수 등의 1천여명의 군중이 합세하여 춘천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군인 중에 신망이 두터운 성익현은 춘천진위대의 일부 병사들과 포수 등 약 4백여명을 포섭하여 의병대열에 참가시켰다. 우선 춘천의병은 춘천관찰부의 관아(官衙)를 점령하고 탐관오리 민두호(閔斗鎬)의 생사당(生祠堂)을 파괴하는 동시에 동년1월 20일 당시 명망이 두터운 유생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여 항전대세를 갖추는 한편, 의병대장의 명의로 각지에 격문(檄文)을 보내 기의(起義)를 촉구하는 동시에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로 부임하는 조인승(曺寅承)을 잡아 처단하였으며, 서울로 진격하여 가평 벌업산(寶納山)에서 관군(경군)과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관군에 비하여 군비가 열세한 의병이 싸움에서 패퇴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잔여의병을 데리고 동년 3월경 영동지방으로 들어가 통천(通川)을 거쳐 고성(高城 : 杆城)의 친일적인 고성군수 홍종헌(洪鍾憲)과 양양군수 양명학(楊命學)을 처단하고 민용호(閔龍鎬)의 강릉의진과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그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1907년 8월부터 독립의병진으로 강원도 울진·삼척·평해 등지에서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경상북도 북부까지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7년 10월 12일 휘하의 도총장(都總將, 혹은 中軍將) 정경태(鄭敬泰)와 더불어 의병 270명으로 평해 관아(平海官衙)를 습격하여 군자금 4백원을 접수하였고, 동년 10월 18일 변학기(邊鶴基) 등과 연합하여 의병 5백명으로. 울진읍내(蔚珍邑內)의 경무고문분견소(警務顧問分遣所)를 기습하여 8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적을 패주케 하는 동시에 분견소·군아·우체소 등을 불태우고 많은 물자를 노획하였다. 또 이듬해인 1908년 4월 의병을 거느리고 울진에 들어가 활동하였고, 동년 5월 초에는 이강년(李康秊)·김상태(金相泰)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삼척(三陟)지방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5월 16일(음 4. 17.) 경북 봉화군의 서벽(西壁)전투와 재산(才山)전투에서 이강년 의진을 지원하는 등 태백산 지역에서 크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동년 7월부터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이 그 일대에서 실시하게 됨으로서 그의 활동이 여의치 못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신기철(申琦澈)

 

   1921∼생존. 춘천 신북읍 용산리(龍山里) 출신으로 춘천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중인 1938년 2월 항일비밀결사인 동 교의 상록회(常綠會, 1937. 3. 조직)에 이연호(李淵瑚)의 권유로 가입하였고, 상록회의 임원개편으로 동년 9월 상록회장 겸 서적계(書籍係)의 일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는 재학 당시 맏형인 신옥철(申玉澈 : 동교 1회 졸업, 광복후 6대 국회의원, 강원일보사장 역임)과 세째형인 신영철(아4랬, 동교 7회 졸업)로부터 민족주의 사상을 주입받아 항일독립의식이 투철하였다. 그런데 1938년 가을 상록회 조직이 일경에게 탄로되자 연루자 모두가 체포되어 그 역시 1939년 12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광복후 성균관대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한글사전편찬에 종사하여 『새 우리말 큰사전(1975)』 등을 동생 신용철과 같이 편찬 간행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신영철(申瑛澈)

 

   1916∼?. 춘천 신북면 용산리(龍山里) 출신으로 1935년 3월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춘천군 동산면 서기와 김화군 고원(雇員)으로 봉직하였다. 그는 1936년 8월 같은 읍내의 이홍채(李鴻采, 우두리)·박우홍(朴禹弘, 율문리)·이종식(李鍾植, 신동리) 등과 함께 민족의 자각과 민족 고유문화 연구에 공감하고,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에게 민족주의 사상을 주입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체포된 그는 1940년 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광복 후 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6·25동란 때 납북당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안귀봉(安貴鳳)

 

   1900(고종 광무 4)∼1984. 춘천 북산면 사람으로 일명 교순(敎淳) 병태(柄泰)이다. 1907년 춘천일대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가 피체되어 총살당한 그의 외삼촌 마정삼의 아들인 마도현·마만봉 형제와 박영관(朴永寬)의 아들인 박순구(朴順九)와 더불어 1921년 9월경부터 화승총과 사냥총으로 무장하여 홍천(洪川) 일대에서 대일항쟁을 벌이던 차에 친형인 안이순(安二淳)의 뜻을 모두 따르기로 하고, 또 마도현의 친인척인 마남용(馬南龍)·전봉학(全鳳學) 등을 추가 가담시켜 총원 12명으로 장총단(長銃團)을 구성하였다.

 

   이후 7년여 동안 인제의 가리산(伽里山)을 본거지로 하고 홍천·춘천·인제·양구 등지를 무대로 하여 전후 19회에 걸쳐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일경을 사살 처치하며, 부호층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 혹은 징수하는 등의 활동으로 이 일대의 일경을 괴롭혔으나 1927년 11월 일본군경의 대규모 작전에 전원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1928년 10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안삼순(安三淳)

 

   1894(고종 31)∼1941. 춘천 동면 사람으로 일명 태선(泰善)이다. 그는 1921년 9월경 외삼촌 마정삼의 아들 마도현·마뇌병(馬雷炳)·마만봉 형제와 박영관(朴永寬)의 아들인 박순구(朴順九) 등이 1907년 의병투쟁을 전개하다가 일본군에게 체포 총살당한 부친의 원수를 갚고 침략자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화승총과 사냥총으로 무장하고 홍천(洪川)일대를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때 그의 형인 안이순(安二淳)의 뜻을 쫓아 총원 12명으로 장총단(長銃團)을 구성하고, 7년여간 인제의 가리산(伽里山)을 본거지로 하고 홍천·춘천·인제·양구 등지를 무대로 전후 19회에 걸쳐 경찰주재소를 습격, 일경을 사살 처단하였으며, 또 부호층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금 혹은 징수하는 등 활약하였다. 그러나 1927년 11월경 일본군경의 대규모 포위 수색으로 모두 체포되어 그는 1928년 10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안이순(安二淳)

 

   1889(고종 26)∼1955. 춘천 동면 사람이다. 1921년 9월경 마도현, 마뇌병·마만봉 형제와 박순구 등이 부친의 원수를 갚고 일제의 침략세력을 토발키로 맹약하여 화승총과 사냥총으로 무장하면서 홍천(洪川)일대를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때 안이삼은 그들과 동생인 안삼순(安三淳), 안귀봉(安貴鳳) 그리고 마도현의 친인척인 마남용(馬南龍), 전봉학(全鳳學) 등을 추가로 가담시켜 총원 12명으로 장총단을 구성하고 활동하였다. 1927년 11월경 체포되어 1928년 10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6년 9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유근택(劉根澤)

 

   1920∼? 춘천 북산면 내평리(內坪里) 출신으로 춘천농업학교 재학 당시 이준환(李俊桓, 김화)·반영균(潘榮均, 홍천)·김창경(金昌卿 등이 주동하여 조직한 항일비밀결사인 독서회에 김시묵(金時默, 평강), 김재하(金載河, 평강) 등과 같이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독서회 회원들은 매월 회비(50전)를 내어 민족의 교양서적인 『흙』 등을 구입한 책을 통하여 토론도 하고 독후감도 발표하면서 민족적 교양과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그러나 조직이 탄로나서 모두가 검거되었는데,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circle03_darkblue.gif 유돈상(柳敦相)

 

   1894(고종 31)∼1935. 춘천 남면 가정리(柯亭里)에서 유제원(柳濟遠)과 윤희순(尹熙順)의 아들로 의병장 유홍석(柳弘錫)의 손자이다. 이명(異名)은 영식(瑛植)·동식(東植)·효준(孝俊)·효남(孝男)이고, 자는 백윤(佰允), 호는 해암(海岩)이다. 조부인 유홍석이 을미의병과 정미의병 때 춘천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한일병탄의 국치를 당하여 1911년 이소응 등 종족(宗族) 사우(士友)들과 함께 요동 땅으로 망명하자 조부의 뒤를 따라 김림성 회인현(懷仁縣)으로 건너가그곳에서 조부의 독립운동을 도와 적극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3년 조부 유홍석, 이어 1915년 재종조부 유인석(柳麟錫)과 부친 유제원이 별세하자 그의 애통함이 사무쳐 더욱 독립운동에 정진하게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흩어져 있는 애국지사를 찾아 음성국(陰聖國) 등 18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조직 활동하였고, 동지들과 함께 홍익단(弘益團)과 합세하여 왜적을 물리치고자 준비하였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음성국과 중국인 장정호와 더불어 학교를 설립하고 인재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 1915년 국내로 들어와 춘천군 남면, 충북 제천군 장담(長潭), 서울 마포, 충남 천안 등지를 순회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군자금을 모으고 민족의식과 애국사상을 계몽하였다.

 

   1931년 요동으로 다시 들어간 그는 각 독립단체와 연결을 맺고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에 왜적의 급습과 방화로 가옥과 문적(文蹟)이 소실되고 그 화를 면한 가족은 흩어지게 되었다. 그는 왜적의 추적이 계속되자 근거지를 무순(撫順)으로 옮겨 독립단을 재조직하고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35년 왜적 수십명의 급습으로 음성국(유돈상의 장인)과 같이 체포되어 동년 7월 19일 모진 고문 끝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유봉석(柳鳳錫)

 

   1857(철종 8)∼1909(순종 융희 3). 춘천 남면 발산리(鉢山里) 출신으로 자는 여상(汝翔), 호는 경와(敬窩)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김평묵·유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5년 변복령 등의 을미개혁과 민비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의 변고를 듣고 이소응·유중악 등과 같이 지평의 용문사(龍門寺)에서 의거를 논의하였으며, 을미의병이일어나자 1896년 1월 이소응의 춘천의진에 가담하여 가평일대에서 항전하였다.

 

   그후 1907년 8월 정미의병이 봉기할 때 유홍석(柳弘錫)의 춘천의병진에 참가하여 가평의 주길리(珠吉里)와 춘천의 진병산(陳兵山, 현 금병산) 전투에서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각처의 의병이 잇달아 패하고, 의세(義勢)가 약화되자 후일을 기약하면서 가정리 환골(桓谷)에 돌아와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한일병탄의 전해인 1909년 4월 13일 향리인 남면 발산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유영석(柳寧錫)

 

   1876(고종 13)∼1907(순종 융희 1). 춘천 남산외면 가정리(현 남면 가정리)출신으로 유중삼(柳重參)의 장자이다. 자(字)는 치명(致明)이며, 족숙(族叔) 유중악에게 수학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이소응의 춘천의병진에 유홍석 등과 함께 참가하여 가평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일어난 1907년 8월 유홍석을 중심으로 6백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재기한 춘천의진에 참가하였고, 가평 주길리(珠吉里) 일대에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혈전에서 유흥석이 부상당하고, 동년 8월 19일 유영석이 전사하였다. 이때 부인 원주 원씨(元氏 : 최골댁)는 남편을 도우며, 유홍석의 자부인 윤희순의 군자금 모금운동에 동참하여 화약과 실탄을 제조하는 등 춘천의진을 적극 후원하였다.

   정부에서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유인석(柳麟錫)

 

   1842(헌종 8)∼1915. 한말의병장으로 춘천 남면 가정리 출신이다.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 중곤(重坤)의 아들로, 14세 때 족숙(族叔)인 중선(重善)에게 입양되었다. 위정척사 사상의 원류인 이항로의 문하에서 김평묵과 유중교로부터 학문과 사상적 영향을 받은 그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때 홍재구(洪在龜) 등 강원도·경기도 유생 46인과 합께 척양소(斥洋疏)를 올려 개항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김평묵과 유중교가 사망하자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정통도맥(正統道脈)을 계승하여 학파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따라서 제천 장담(長潭)에서 유중교의 기반을 계승하기 위하여 1895년 6월 그곳으로 옮겨 후진을 교육하였다. 그는 을미사변과 단발령 실시를 계기로 사우들과 학께 1896년 2월 3일(음 12. 20.)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는데 그의 제천의진(호좌의진)은 한때 3천여명에 이르렀고, 제천·충주·단양·원주 등지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 일대를 석권하면서 친일관찰사(金奎軾)·군수 등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장기렴(張基濂)이 지휘히는 관군의 공격으로 최후의 거점인 제천성을 상실하였다.

 

    그후 재기를 도모하고자 서북대행군(西北大行軍)을 감행, 강원·황해·평안도로 이동한 그는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로 들어갔으나, 도리어 회인현 현재 서본우(懷仁縣 縣宰 徐本遇)에게 의병이 무장해제를 당하여 동년 7월 28일 혼강(혼江)에서 의병을 해산시킨 후 통화현 오도구(五道溝)에서 머물렀다. 그는 1897년 3월 고종(高宗)의 소명(召命)으로 일시 귀국했다가 재차 그곳으로 망명하여 한인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향약(鄕約)을 실시하였으며, 1900년 7월 의화단난(義和團亂)을 피하여 귀국한 그는 서북지역 각지를 돌며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후일 이진용(李鎭龍)·백삼규(白三圭)등의 의병장을 배출하였다. 1907년 고종퇴위와 정미7조약 그리고 군대해산으로 더 이상 국내활동이 어렵게 되자, 1908년 7월 망명길에 올라 노령(露領)의 블라디보스톡(海蔘威)로 들어가 그곳에서 이상설(李相卨)·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1910년 6월 연해주 의병세력의 통합체인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였고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되었으며,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조국의 멸망과 러시아의 탄압으로 십삼도의군이 와해되자 1914년 3월 서간도 봉천성 서풍현(西豊縣)에 정착하는 제3차 망명을 단행하였다. 그러다가 1915년 1월 29일(음) 봉천성 관전현 방취구(寬甸縣 芳翠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우주문답』(宇宙問答, 1913)을 저술하였고, 그의 정신을 결집한 『소의신편』(昭義新編, 1902)이 문인(門人)들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建國勳章)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다.

                                        Bullets021_1.gif  의암유인석로고.jpg

 

circle03_darkblue.gif 유중락(柳重洛)

 

   1842(헌종 8)∼1922. 춘천 남면 발산리 출신으로 자는 사원(士源)이요, 호는 오천(午川)이다. 을미개혁의 변복령과 민비시해인 을미사변 그리고 단발령 공포로 민심이 동요하고 국수보복을 위한 을미의병이 각처에서 봉기하자, 1896년 1월 의병장 이소응의 춘천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때 유중락은 유중악·유봉석(柳鳳錫)·유홍석(柳弘錫)등과 합께 춘천의병진에 가담하여 가평일대에서 접전하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1907년 8월 고종퇴위에 이어 한국군대의 해산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유홍석의 춘천의병에 참가하여 가평의 주길리(珠吉里)와 춘천의 진병산 전투에서 혈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유홍석이 부상당하고 유영석이 전사하는 등 격전을 치렀으나 패전하였다. 이에 유중락은 은신하면서 후진교육에 전력하다가 1922년 12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유중악(柳重岳)

 

   1843(헌종 9)∼1909(순종 융희 3). 춘천 남면 방하리(芳下里, 현 남이섬) 출신이다. 유호(柳晧)의 장자로 자는 백현(白賢), 호는 항와(恒窩)이며, 이항로·김평묵·유중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이근원·유인석(柳麟錫)과 함께 척양상소를 올렸으며, 1895년 을미사변(민비시해사건)을 통탄히 여겨 가정리 주산(周山)에서 통곡문(痛哭文)을 지어 발표하였다. 을미의병이 일어날 무렵에그는 유봉석·이소응과 함께 기의(起義)할 것을 의정(議定)하고, 1876년 1월 유중락·이만응(李晩應) 등과 더불어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하는 춘천의병을 일으켰으며, 춘천창의포고문(春川倡義布告文)을 지어(춘천의병대장 명의) 선포케 하는 동시에 유홍석 등과 더불어 가평일대에서 관군과 혈전을 치렀다.

 

   그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1907년 8월 유홍석·유영석(柳寧錫)·박선명(朴善明)·박화지(朴華芝) 등과 남면 가정리에서 6백여 의병을 모아 춘천의병을 일으켰으며, 춘천의 진병산과 가평의 주길리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다. 한편 유홍석의 자부인 윤희순이 부족한 군자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모금할 때 유중악은 농우(農牛) 한 마리를 내었고, 부인 순천 박씨(朴氏 : 항와댁), 유태석(柳台錫)의 부인 영양 천씨(千氏 :약암댁), 유제곤(柳濟坤)의 부인 진천 송씨(宋氏 : 두산댁) 등의 문중과 권일선(權一善)의 모친인 남양 홍씨(洪氏 : 팔봉댁) 등이 지원한 군자금으로 화약과 실탄을 제조하고 의병훈련을 실시하는 등 춘천의병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렇듯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한 그는 가정리에 돌아와 후진교육에 전념하다가 1909년 5월 23일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유제곤(柳濟坤)

 

   1877(고종 14)∼1948. 춘천 남산외면 가정리(현 남면 가정리) 출신으로 자(字)는 성우(聖禹)이다. 유창석(柳昌錫)의 장자이며, 유인석의 족질(族姪)로서 유중악에게 수학하였다. 정미의병 당시 1907년 9월 유중악·유흥석·박선명(朴善明)·박화지(朴華芝) 등과 함께 기의하여 향리인 여의내골 주산(餘義內谷 周山)에서 탄약을 제조하고 군사훈련도 실시하였다. 이에 6백여명의 춘천의병은 가평 주길리와 춘천의 진병산등지에서 일본군을 맞아 혈전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유제곤은 이 전투에서 일군의 총에 맞아 부상을 입고 숨어서 치료하던 중에 1910년 한일병탄이 되자 유홍석이 망명한 중국(서간도)으로 들아가 함께 일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1914년 일경의 급습으로 온 가족이 몰살당하고 머리부상의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게 되어 1915년 12월 가정리에 귀향한 그는 광복 후 1948년 12월 25일 병사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유제춘(柳濟春)

 

   1891(고종 28)∼1981. 춘천 남면 가정리 출신, 의병대장 유인석의 차남으로 이명은 해동(海東), 자는 사인(士仁), 호는 전와(全窩)이다. 1908년 6월 부친인 유인석이 의병활동의 근거지를 해외에 두고 지구전(持久戰)을 펴기 위하여 노령(露領) 땅 연해주의 해삼위로 망명길에 오르자 맏형인 유제함(柳濟咸)과 같이 부친과 동행하였고 그는 그곳에서 1910년 6월 13도의군의 편성, 동년 8월 성명회(聲明會) 조직 등 부친의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에 뒷바라지를 하였다. 또 1919년 만주 심양(瀋陽)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한 의병장 박장호(朴長浩)를 보좌 하면서 해외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유제함(柳濟咸)

 

   1884(고종 21)-1960. 춘천 남면 가정리 사람이다. 본래 유인석의 삼종제(三從弟)인 유의석(柳毅錫)의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나 그가 4살 때인 1887년 유인석의 양자(장자)로 들어갔으며, 1895년 5월까지 양부와 같이 가정리에서 살다가 다시양부와 함께 충청북도 제천의 구탄(九灘)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자는 사형(士亨), 호는 직와(直窩)이다. 의병대장 유인석이 을미의병 당시 제천의진(호좌의병)으로 항일투쟁을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노령에 항구적인 항일기지를 구축하여, 본토수복의 진공방략을 모색하면서 전국 의병진에서 지구전의 소중함을 역설하였다.

 

   이에 1908년 2월 유제함과 김낙원(金洛源)은 동남의 의병들이 서북으로 근거지를 옮겨 백두산 부근의 무산·삼수·갑산 등지에 기지를 마련한 후, 청(淸)과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시에 서울로 입성할 것을 제안하는 유인석의 서신을 이강년(李康秊)·허위(許蔿)의병진에 가서 전달하고 의병을 고무케 하였다. 또 1908년 6월 부친인 유인석이 노령 땅 연해주의 해삼위로 망명길에 오르자 그를 따르는 문도(門徒) 60여명과 함께 그 곳에 가서 13도의군의 편성, 성명회 조직 등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정부에서는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유태석(柳台錫)

 

   1858(철종 9)∼1933. 춘천 남산외면 가정리에서 유중협(柳重挾)의 장자로 출생하였다. 자는 응삼(應三), 호는 춘계(春溪)이다. 유중악과 유중교에게 수학하였으며,유인석의 족제(族弟)이다. 을미의병 당시 1896년 1월 이소응의 춘천의진에 가담하여 유홍석과 같이 가평일대에서 의병항전을 전개하였다. 그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유홍석을 중심으로 재기한 춘천의진에 참가하여 가평 주길리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다.

 

   이때 그의 부인 영양 천씨(千氏 : 약암댁) 역시 유홍석의 자부인 윤희순과 함께 군자금 모금에 동참하였고 화약과 실탄을 제조하며 의병훈련에 협조하는 등 춘천의진을 적극 지원하였다. 1907년 11월 왜적의 급습으로 가옥이 소실되었고(당시 유인석·유중악·박선명의 집도 손실됨) 1910년 한일병탄의 국치 이래 국내의병이 해외로 흩어져 항일투쟁을 전개하자 유태석은 향리인 가정리로 돌아와 1912년 약계서사(藥溪書社)를 세워 후진교육에 힘쓰다가 1933년 8월 11일 세상을 떠났다(일본측 기록인『폭도사편집자료』에는 1907년 11월 체포되어 피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임).

   정부에서는 1993년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유하석(柳夏錫)

 

   1849(현종 15)∼1907. 춘천 남면 가정리 사람으로 자는 여삼(汝三), 호는 산수(汕수)이다. 을미의병 당시 1896년 2월 3일(음 12. 20.) 유인석의 제천의진이 결성되자 동월 제천의진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제천의진이 3개월 동안 벌인 의병활동의 성과는 대단하였으나, 마침내 관군에 패하여 제천성이 함락되고, 서북대행군(西北大行軍) 끝에 동년 8월 28일(음 7. 20.) 유인석이 요동(만주)으로 들어갈 때 동행하였다. 그 후 유인석의 의병활동을 도와 활동하던 그는 1907년 8월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동년 12월 3일(음 10. 28.)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참살되었다.

   정부에서는 1986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유홍석(柳弘錫)

 

   1841(현종 7)∼ 1913. 한말의병장으로 춘천 남면 가정리 출신, 본관은 고흥, 일명 홍석(鴻錫), 자는 효백(孝伯), 호는 외당(畏堂), 유인석의 재종형이다. 일찍이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에게 수학하였다. 민비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1896년 1월 유중악·유중락·유봉석·김경달 등과 함께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하는 춘천의병을 일으켰다. 그후 1896년 2월 3일(음 12. 20.) 제천의진(호좌의진)이 형성되자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서무를 관장하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의병들이 정부의 해산책에 회유되어 사기저하와 이탈자가 속출하자 '고병정가'(告兵丁歌 : 210首)를 지어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동년 8월 28일(음 7. 20.) 제천의진이 서북대행군 할 때 초산(楚山)을 거쳐 유인석과 함께 만주로 들어갔다가, 1897년 그와 더불어 환국한 후 춘천 가정리에서 후진교육에 힘썼다.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5조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유인석과 함께 의거할 것을 논의하였고, 1907년 고종의 퇴위, 정미7조약, 군대해산 등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유중악·유영석·유제곤·박선명·박화지 등과 함께 의병 600여명을 모아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때 군량과 탄약 등 군자금이 부족하여 유중악이 농우를 내고, 주민들이 적극 협력하여 무기제조장을 설치하고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춘천 진병산과 가평 주길리에서 일본군과의 교전 끝에 패하였다. 그 후 1910년 치욕적인 한일병탄으로 1911년 종족과 사우들과 함께 만주 흥경현(興京縣)으로 갔다가 다시 관전현(寬甸縣)으로 옮겨 독립운동을 위해 힘쓰다가, 73세가 되던 1913년 요동 회인현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윤경옥(尹璟玉)

 

   1901(고종 광무 1)∼? 춘천 신북읍 천전리(泉田里) 출신으로, 서울 배화(培花)여학교의 학생이었다. 1920년 3· 1운동 일주년을 맞이하여 학교기숙사에 태극기를 달아놓고 기념식을 끝낼 무렵 뒷산에서 한수자(韓壽子, 화천출신)가 주동하여 몇 학생이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이때 윤경옥은 왕종순(王宗順, 철원출신)·지은원(池恩源, 춘천출신) 등과 더불어 뒷산으로 올라가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에 만세를 불렀던 학생 24명이 종로경찰서에 호출되어 1주일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심문을 받았다. 결국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심문받은 24명 전원이 송치되어 1920년 4월 5일 윤경옥(당 19세)은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circle03_darkblue.gif 윤도순(尹道淳)

 

   1859(철종 10)∼? 춘천 동면 감정리(甘井里) 사람이다. 1919년 3·1만세시위 소식이 전해지면서 춘천에서도 천도교도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 시위 분위기가 조성되어 갔다. 춘천 천도교회는 봉훈 윤도순, 교구장 이준용, 박순교 등이 춘천읍내에서군중을 모아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에 윤도순은 3월 10일 동면 만천리(萬泉里) 교구실에서 이 마을 허기손(許基損) 등 수명과 동월 13·14일에 춘천읍 가연리의 안동식(安東植), 그리고 신남면 송암리의 차성강(車聖康)·차상덕(車相德) 등 수명에게 시위할 것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탄로되어 윤도순이 체포되어 잠시 중단되고 말았다. 춘천시위 계획은 이준용·박순교·허기준(許基俊, 동면 장학리)이 다시 협의하여 3월 28일 춘천읍 장터에서 끝내 전개하였다. 윤도순은 동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윤희순(尹熙順)

 

   1860(철종 11)∼1935. 여성독립운동가. 본관은 해주(海州), 서울출신, 익상(翼商)의 딸이다. 16세 때 고흥 유씨(高興柳氏) 제원(濟遠)에게 출가하여 유홍석의 며느리, 유중교의 증손부가 되었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강행되자 시아버지인 유홍석이 유중악·유중락 등의 춘천유림과 더불어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춘천과 가평일대에서 의병작전을 전개할 때,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병정의 노래'등 수십 수의 의병가를 지어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켜 직·간접으로 춘천의병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이때 춘천의병이 무기의 열세로 적의 공격에 못이겨 유홍석이 재종제인 유인석의 제천의병(호좌의진)에 가담하여 의병항쟁을 벌였다. 또 유인석과 함께 요동에 들어갔다가 귀국하는 동안, 다른 지방에서 온 의병에게 마을 부녀자와 협력하여 밥을 지어주고, 빨래를 하여 주는 등 의병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그후 1905년 을사조약에 이어 1907년 고종황제 퇴위, 정미7조약, 한국군대 마저 해산시키자 각지에 흩어진 해산군에 의하여 정미의병이 봉기하였다. 이에 동년 8월 유홍석은 족숙인 유중악(柳重岳) 등과 모의한 후 가정리 항골(恒谷)에서 유영석·유봉석·박화지 등과 더불어 의병 600명으로 가평 주길리 등지에서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때 의병자금과 탄약·군량이 부족하게 되자 윤희순은 향민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여 여의내골 주산에서 눗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무기와 탄환을 제조 공급하는 한편, 의병가를 짓고 이를 부르게 하여 의병훈련을 진작시켰다.

 

   유흥석이 가평 주길리 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제천 장담리(長潭里) 유중교의 집에 머무르고 치료하면서 의병재조직을 계획하던 중 1910년 8월 국치를 당하게 되자, 왜적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 하여 종족 사우들과 먼저 만주로 망명 이주하였다. 이에 그는 1911년 시부인 유홍석의 뒤를 따라 만주로 들어가서 항일운동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3년 12월 유홍석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타계하고, 1915년 1월 이미 망명해 있던 유인석이 세상을 떠났으며, 남편인 유제원 마저 독립운동을 꾀하다가 동년 10월 회인현(懷仁縣)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윤희순은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투쟁하고 있는 돈상(敦相)·민상(敏想) 두아들을 포함한 자손들에게 희망을 걸고 국권회복을 염원하면서 살아오다가, 맏아들인 돈상이 그의 동지이며 장인인 음성국(陰聖國)과 함께 일본경찰에 잡혀 고문 끝에 1935년 7월 19일 순국함으로써, 3대에 걸쳐 의병활동을 뒷바라지를 하여 오던 그는 10여일 뒤인 동년 8월 1일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과 일생기록을 남기고 향년 76세로 만주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신은 만주 해성현 묘관둔(海城縣 苗官屯) 북산에 묻혔으나, 1994년 10월 20일 정부의 후원과 친손자인 연익(然益)의 노력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가정리 선영(先塋)에 반장(返葬, 남편 유제원과 합장)되었다.

   정부에서는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이경응(李景應)

 

   1865(고종 2)∼1947. 춘천 남면 하방곡리(下芳谷里, 현 강촌리) 출신 의병장이다. 이소응의 종제로 초명(初名)은 회응(晦應)이고, 자는 경학(敬學)이다. 1895년 8월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20일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한 춘천의진이 봉기하였다. 이때 춘천 관찰부의 관아(官衙)를 습격 점령하여 의세가 충천하였고, 격문을 각지에 보내 함께 기의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로 부임하는 조인승(曺寅承)을 전국에서 처음으로 처단하여 기세를 높였다. 그러나 서울로 진격하던 춘천의진은 가평 벌업산 전투에서 관군(경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그들의 병력에 비하여 전략전술, 그리고 무기의 열세로 당해내지 못하고 패하게 되었다. 이때 의병대장을 이끌어간 이소응은 병력과 무기를 보충하려고 경기도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아가 원병을 청하였다. 그러나 무위로 끝나자 동년 2월 17일 유인석의 제천의진(호좌의병진)으로 합류하였다. 이에 그의 친형인 이진응(李晋應)이 춘천의병을 지휘하였으나 끝내 전사하였고, 다시 그가 대장이 되어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역시 패전하였다. 그는 잔여의병 2백여명을 이끌고 동년 4월 하순경 민용호(閔龍鎬)의 강릉의진으로 들어갔다가 6월 중순경에는 한때 제천의진에 합류하였으며, 동년 7월부터 재차 강릉의진에 들어가 민용호의병이 북행(北行)할 적에 가세하여 인제군 서화(瑞和)의 용산(龍山)전투에서 적과 격전을 벌였다. 결국 이 싸움에서 패한 이경응 의병진은 거의 전투력을 상실하였으므로 이후부터 의병활동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circle03_darkblue.gif 이경호(이경호)

   1925∼? 춘천 소양로 사람이다. 일제 말 1942년 서울에서 항일비밀결사인 구조단(求朝團)에 입단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서울시내 중학교 이상의 학생들에게 항일민족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만주로 특파되어 재만동포와 연계하여 지하조직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하던 중, 1944년 만주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그는 1945년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이교관(李敎寬)

 

   1908(고종 융희 2)∼? 춘천 사북면 오탄리(梧灘里) 사람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마을에서도 이 운동에 호응하고 독립기운을 조성할 목적으로 3월 31일 오탄리 최기환(崔基桓) 집에서 최기환·김공모(金公模) 등과 협의하여 4월 1일 석양을 기해서 주민들을 모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숯공장을 경영하는 일본인과 면사무소를 공격하기로 결의하였다.

 

   또 태극기를 만들고 각 주민에게 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고하는 회장(回章)을 작성하여 한의봉(韓意鳳·박순일(朴順一)·김순원(金順元)·김춘택(金春澤) 등의 집에 차례로 회부하였다. 특히 이교관은 동리 사람 윤복균(尹復均)·유철쇠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탄로되어 이교관(당 50세)이 체포됨으로써 계획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는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5월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경성복심원에서 원심의 기각과 동시에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circle03_darkblue.gif 이면수(李勉洙)

 

   1833(순조 33)-1898(고종 광무 2). 춘천 남면 하방곡리(下芳谷里, 현 강촌리) 출신. 생부 유영(惟英)의 3남으로, 유목(惟穆)의 양자로 출계(出繼)하여 사과(司果 :五衛의 武職)로 있었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1월부터 춘천에서도 유중락·이소응 등이 기의(起義)하기로 의정(議定)하여 감역 흥시승(洪時承)과 사과 이면수가 격문(檄文)을 붙이고, 통문(通文)을 돌려 격동케 함으로써 동년 1월 20일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하는 1천여명의 춘천의병이 봉기하였다. 그들은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로 부임하는 친일적인 조인승(曺寅承)을 잡아들여 처단하였고, 서울로 진격한 춘천의진은 가평 벌업산 전투에서 혈전을 벌였으나 신우균(申羽均)의 관군(경군)에게 패하였다.

 

   이때 의병을 지휘하던 이소응은 지평의 감역 맹영재(孟英在)에게 원군을 청하고자 갔다가 여의치 못하여 결국 유인석의 제천의진으로 합류하였고, 그 대신 이진응이 춘천의진을 맡아 싸웠으나 전사하였으며, 역시 이진응의 동생 이경응(李景應)이 대장이 되어 혈전을 벌였으나 견디지 못하고 영동지방으로 들어가 민용호(閔龍鎬)의 강릉의진으로 떠나갔다.

 

 

circle03_darkblue.gif 이란(李欄)

 

   1925∼? 춘천 신북읍 출신, 1939년 춘천중학교(춘천고등보통학교의 개명) 재학 중에 교내 독서회에 참가하여 독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춘중(春中)의 독서회는 조직의형성은 없었으나 독서운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심화시켜갔다. 1938년 가을에 항일학생결사인 춘천고보의 상록회(常綠會) 조직이 일경에 발각되어 전 회원이 검거된 후, 춘중학생들은 시내의 북성당(北星堂) 서점에서 민족의식이 담긴 서적(흙, 상록수, 조선의 현재와 장래 등)을 구독하고 독후감을 교환 토론하여 항일의식을 제고하면서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고자 자생적으로 형성된 모임체가 독서회였다. 특히 뜻있는 학생들은 이란의 부친인 이림수(李林洙, 關東病院 경영)가 민족운동의 지도자인 여운형(呂運亨)과 독립군 후원관계로 친교를 맺고 있어 여운형이 춘천에 자주 왕래하였는데, 그때마다 학생들이 방문하여 인도의 '간디'이야기, 상해임시정부의 활동, 중일전쟁의 전망, 세계정세의 동향과 조선인 학생의 진로 등 항일의식을 심화시켜 갔다.

 

   그러던 중 독서운동에 참여하던 고제훈(高濟勳, 김화)·원후정(元厚貞, 횡성)·김영근(金榮根, 회양)·박영한(朴泳漢)·권혁민(權赫民, 평강) 등이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1941년 3월 10일(일본육군기념일) 모의시가전을 벌일 때 일본인 학생과 충돌이 일어났고, 이를 일본인 교관(大町소위)이 고발함으로써 동년 3월 23일 춘천경찰서 형사들이 관련학생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독서운동이 탄로되었다. 이로 인하여 체포된 그는 7월 검찰(춘천지청)에 송치되었고, 동년 11월 11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2년 3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단기 1년 장기 3년형의 부정기형(不定期刑) 선고를 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80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이만응(李晩應)

 

   1857(철종 8)∼1938. 춘천 남면 하방곡리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경덕(敬德), 이소응의 종제이다. 1895년 8월 국모가 시해(弑害)되었고 단발령을 실시하여 각처에 서 을미의병이 봉기하였다. 1896년 1월부터 춘천에서도 유중악, 이소응 등이 거의 하기로 의정(議定)하고, 감역 홍시승·사과 이면수 등이 격문(檄文)을 붙이고 통문(通文)을 돌려 격동시키며, 이수춘(李守春)·민영문(閔泳文) 등이 고무 격려하였다. 따라서 유중락·이만응·김경달 등과 정인회(鄭寅會)·박현성(朴鉉成) 등 유생·농민·상임군인·포수·보부상의 1천여명이 의병으로 봉기하였다.

 

   동년 1월 20일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한 춘천의진은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로 부임하는 조인승을 잡아 처단함으로써 의세가 충천하였다. 이러한 기세로 서울에진격하던 춘천의진은 가평 벌업산 전투에서 관군(경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에 종형 이소응은 지평 감역 맹영재(孟英在)에 원병을 청하려고 지평에 갔다가 여의치 못해 유인석의 제천의진으로 합류하자 친형인 이진응이 춘천의병의주장(主將)을 맡아 싸우다가 약사원(藥司院, 현 약사동)에서 전사하였으며, 이어 그의 친동생 이경응이 대장을 맡아 싸웠으나 끝내 패하여 강릉의진으로 합세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이소응(李昭應)

 

   1857(철종 3)∼1930. 한말의병대장으로 춘천 남면 하방곡리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 일명 의신(宜愼)·직신(直愼), 자는 경기(敬器), 호는 습제(習齊)·사정거사(思靖居士)이다. 김평묵·유중교에게 사사(師事)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었고, 인품이 고매하여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유중악·유중락·유봉석·유홍석·이면수·이진응 등 유생과 정인회·박현성 등 농상민(農商民) 그리고 성익현 등 춘천진위대 일부병사와 포수 4백여명이 합세한 1천여명의 군중들이 춘천관찰부 관아(官衙)를 습격 점령하고, 탐관오리 민두호의 생사당을 파괴하여 의세가 충천하였으며, 동년 1월 20일 그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춘천의진의 이소응은 척사위정의 대의를 내세워 일본을 왜노(倭奴)로 규정하고 격문을 각지에 보내 함께 기병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춘천 관찰사 겸 선유사로 부임하는 조인승을 처단하여 기세를 높였다. 그러나 서울로 진격하던 춘천의진은 관군과 가평 벌업산 전투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게 되었다. 이에 이소응은 유인석의 제천의진(호좌의병진), 민용호(閔龍鎬)의 강릉의진으로 합류하기도 하였다.

   

   그후 이소응은 한일병탄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1911년 유홍석 등 종족(宗族)·사우(士友)들과 같이 요동으로 망명하여 유인석·유홍석과 합께 본토진공의 방략을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1930년 4월 23일(음 3. 25.) 만주 봉천성 강평현(奉天省 康平縣)에서 79세로 일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이윤석(李胤錫)

 

   1894(고종 31)∼1953. 춘천 신북면 우두리(牛頭里) 출신으로, 자는 자운(紫雲)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장기영(張基榮)·정흥교(鄭興敎) 등과 함께 가평(加坪)일대의 3·1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4일 정흥교와 만나 독립선언서 를 보여주면서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3월 15일 오전 9시 가평읍(可坪邑)에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한다는 내용의 격문을 이윤석이 2통, 정흥교가 1통을 작성하였다. 따라서 정흥교는 면내의 적목리(赤木里) 등 4개마을의 연락을 맡기로 하고, 이윤석은 이곡리(梨谷里) 등 4개마을을 담당키로 하였다. 또 그는 독립선언서 속에 끼워 격문 1통을 이만석(李萬錫)에게 주고, 나머지 1통을 정재명(鄭在明)에게 교부하여 북면(北面)일대의 주민들에게 연락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3월 15일 오전 9시 이윤석은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자신이 만든 10여개의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청으로 행진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학교와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군 헌병에게 이윤석·정흥교 등 10여명이 함께 체포되어 헌병대 분견소로 강제 연행되었다. 이튿날 이윤석 등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으나, 결국 동년 9월 25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소위 보안법 및 소요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이종식(李鍾植)

 

   1915∼? 춘천 신북면 신동리(新銅里, 현 신동) 출신으로 1936년 3월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북면 서기로 재직하다가 1938년 2월 사직하고 향리에서 농사에 종사하였다. 그는 1936년 8월 춘천고보의 동창인 신영철(申暎澈)·이홍채(李鴻采)·박우홍(朴禹弘) 등과 자주 회합하여 민족의식과 민족문화 연구에 공감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민족주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등 민족운동을 고취하였다. 이 때문에 체포되어 1940년 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박우홍과 함께 치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circle03_darkblue.gif 이준용(李俊容)

 

   1860(철종 11)∼1945. 독립운동가, 호는 호암(湖岩)·용서(用瑞), 춘천 서면 방동리출신으로 3·1운동 당시 춘천 천도교 교구장이었다. 1907년 9월 의병장 지용기(池龍起)의병진에 가담하여 자기 집에 대장소를 설치하고 물심양면으로 의병진에 적극 지원하였다. 1910년 항일병탄을 전후하여 천도교 춘천지역 대표로서 독립자금 모금운동에 사유전답을 헌납하는 등 솔선수범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윤도순·박순교와 같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계획하였다. 이때 윤도순이 각지를 돌면서 선전계몽하다가 체포되자, 이준용은 허기준 등과 다시 협의하여 3월 28일 춘천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날(28일) 이준용·박순교·허기준 등이 태극기를 감추어 장터로 들어가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를 외치자 수십명의 군중이 호응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의 진압에 나선 일본군 수비대에 의하여 현장에서 모두 체포되었다. 이에 이준용은 동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6월형을 선고받고, 6월 경성복심원과 7월 경성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0년 출옥 후 강원도 전역을 순회하면서 청장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45년 4월 타계할 매까지 독립투사로서 오로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이진응(李晋應)

 

   1847(헌종 13)∼1896. 춘천 남면 하방곡리의 유생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경재(敬哉), 호는 직헌(直軒), 이소응의 종형이다. 1895년 을미의병이 각처에서 봉기하자, 1896년 1월 춘천지방에서도 유중악·유중락·유봉석 등이 의병을 일으키기로 의정하고, 감역 홍지승·사과 이면수 등이 유중악이 지은 통문을 돌려 인심을 격동시키며, 이수춘(李守春)·민영문(閔泳文) 등이 고을 사람을 고무 격려하였다. 한편 젊은 선비정인회와 성익현, 그리고 용맹과 담력이 있는 상인 박현성이 합세하여, 유생을 중심으로 농민·상인·군인·포수·보부상 등 1천여명이 기의하였다. 춘천의병은 우선 춘천관할부의 관아를 점령하는 동시에 친일적인 춘천유수였던 민두호의 생사당을 파괴하였으며, 동년 1월 20일 명망이 높은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여 봉기하였다.

 

   그러나 춘천의진에 관군이 패하자, 이소응이 유인석의 제천의진으로 합류하였다가 지평으로 떠난 후 이진응은 춘천의진을 인계받아 주장(主將)으로서 관군과 계속 격전을 벌였으나 동년 2월 8일 약사원에서 끝내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이찬우(李燦雨)

 

   1918∼1983. 춘천 신북면 천전리(泉田里) 출신이디. 그는 춘천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인 1937년 3월 9일 동급생인 남궁태(南宮 , 홍천군 서면)·백흥기(白興基, 횡성군 안흥면)·조규석(曺圭奭, 여주군 대신면)·문세현(文世鉉, 전북 옥구군 목면)·용환각(龍煥珏, 홍천군 홍천읍)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상록회를 조직하였고, 상록회의 조직부서인 조직부장과 서적계의 일을 감당하면서 활동하였다. 상록회 활동은 월예회·토론회·독후감 발표 그리고 농촌운동 전개(춘천 천전리 泉田 修養村 참여) 등으로서 특히 독서회의 활동으로 항일의식을 고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회원은 졸업 후에도 상록회의 활동을 계속하여 각자의 정착지에서 새롭게 상록회를 조직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1938년 3월 졸업한 후 남궁태·문세현·백흥기 등과 만주로 건너가 백홍기와 같이 길림성 영길현(永吉縣) 공립국민우급학교(公立國民優級學校) 교사로 근무하면서 재만독립운동가 이동산(李東山)·오종태(吳鍾泰)·석일경(石一慶) 등과 함께 길림(吉林)에 상록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8년 가을, 춘천에서 상록회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이찬우도 만주에서 체포되었고, 그 후 춘천경찰서로 이송된 그는 1년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9년 12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그는 대한청년단 중앙당무위원을 지내면서 반공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으며, 정부수립 후에는 5대 국회의원과 노동청장을 지냈다.

   정부에서는 1968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이홍채(李鴻采)

 

   1914∼?. 춘천 신북면 우두읍 출신으로 1935년 3월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춘천군 북산면 서기, 1936년 1월 춘천군 고원(雇員)으로 있었다. 1936년 8월 춘천고보 동창인 신영철(申暎澈)·박우홍(朴禹弘)·이종식(李鍾植) 등과 함께 민족의식과 민족문화연구에 공감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아 민족주의 사상을 주입 고취하였다. 이 사실로 위 4인이 모두 체포되어 이홍채는 신영철과 같이 1940년 1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circle03_darkblue.gif 인찬옥(仁璨玉)

 

   ?∼1907(순종 융희 1년). 춘천 사내면(史內面, 현 화천군 사내면)의 유생이다. 1907년 7월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 그리고 동년 8월 한국군대의 해산 등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날 당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사외면(史外面, 현 史北面)의 면장 황기운(黃基雲)과 한중삼(韓重三)·이인환(李寅桓) 등과 모의하여 스스로 결사대의 총대장이 되어 이용규(李容圭)·김제현(金齊鉉)과 같이 격문을 배부하고 의병을 모집하다가 일본경찰 보조원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그후 1907년 10월 경성(서울)으로 호송되는 도중에 탈출하려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정경태(鄭敬泰)

 

   1873(고종 10)∼? 춘천 출신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1907년 8월 31일(음 7. 23.)성익현(成益鉉)의 휘하에 들어가 도총장(都總將) 혹은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당시 강원도 울진·삼척·평해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벌였다. 1907년 9월 2일(음 7. 25.)이상열(李相烈) 등 의병 60여명을 인솔하여 평해읍내의 경무고문분파소(警務顧問分派所)를 습격하고, 일본 순사 백천공명(白川公明) 등과 교전, 패퇴시킨 후 분파소를 파괴하였다.

 

   또 9월 10일에는 휘하의 김범수(金範守)에게 의병 20명으로 평해 군아(郡衙)의 순검과 통역(通譯)을 잡아오게 하였으며, 9월 13일 의병 80여명을 직접 인솔하고 울진(蔚珍)으로 들어가 평해에서 포박해온 순검과 통역을 총살하려 할 때 울진에 상륙한일본 토벌대의 기습을 받고 퇴거하였다. 동년 10월 12일에는 성익현과 합께 의병270여명을 거느리고 평해읍내의 군아를 습격, 군자금 4백원을 접수하였으며, 10월18일 성익현·변학기(邊鶴基) 등과 연합하여 의병 5백여명을 거느리고 울진읍내의 경무고문분견소를 습격하여 8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적들을 패주시키고 분견소·군청·우체소 등을 불태우고 많은 재물을 노획하였다.

 

   그후 1908년 5월에는 이강년·성익현·김상태(金相泰) 등과 연합하여 울진·삼척 지방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성익현이 행방이 불명되자 그는 독립의병장(관동창의대장)이 되어 봉화·영양·안동·평해·울진 등지에서 활약하던 중 체포되어 1911년 8월 10일 함흥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의 선고를 받고 불복, 동년 10월 25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 다시 상고하여 1911년 11월 10열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선고 확정판결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정기공(鄭基公)

 

   ?∼1907. 춘천 서하면 출신이다. 정미의병 당시 1907년 9월 춘천 남면 출신 박선명(朴善明)이 의병을 일으켜 춘천·홍천·가평일대에서 항일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춘천 북면 출신인 최천유(崔天有)가 그의 향리에서 봉기하여 춘천·화천·양구·인제등지에서 의병활동을 벌이었다. 이때 그는 석오석과 함께 항일의병에 참가하여 각지에서 활동 중 잠시 귀가하였다가 적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이에 그는 석오석과 같이 1907년 11월 28일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정인회(鄭寅會)

 

   1868(고종 5)∼1902(고종 광무 6). 춘천 신북면 우두리 출신, 정수영(鄭壽永)의 장남으로, 자는 여인(汝仁)이다. 1895년 을미사변(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 공포에 격분하여 이를 기화로 1896년 1월 군인 중에 신망이 두터운 춘천진위대 전직군인이던 성익현(成益鉉)과 결탁하여 진위대 춘천분견소와 밀통하는 동시에 상민(常民)에서 용맹과 담력이 있는 상인(商人) 박현성과 기맥(氣脈)을 통하여 부중(府中)의 인사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의병봉기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춘천부근에서 모여든 유생·농민·군인·포수·상인·보부상 등 1천여명의 군중은 춘천관찰부의 관아를 습격 점령하고, 춘천부의 전임 유수로 민중을 착취한 민두호의 생사당을 파괴하는 동시에,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에서 기의제(起義祭)를 올린 후 의병진을 설치하여 동년 1월 20일 명망높은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여 춘천의진을 결성하였다.

 

   이에 춘천의진은 의병소의 이름으로 '격고팔도'(檄告八道)라는 격문을 각지에 보내 기의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새로 부임하는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을 잡아 처단하였으며, 서울로 진격 중에 가평부근 벌업산 전투에서 혈전을 벌였으나 관군보다 열세한 춘천의병은 끝내 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을미의병 당시 춘천의병을 결성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항일의병투쟁에 참여한 당시 27세의 젊은 선비였다.

 

 

circle03_darkblue.gif 정철근(鄭鐵根)

 

   1889(고종 광무 3)∼? 춘천 사창리(司倉里, 현 소낙동)사람이다. 정철근(당 20세)은 경성(서울)의 외가에 갔다가 1919년 3월 9일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경기도 한지면 왕십리(漢芝面 往十里 공립보통학교 앞에서 1백여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고 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하여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지용기(池龍起)

 

   ?∼1907(순종 융희 1). 한말 의병장으로 춘천 서면 출신이다. 본명은 홍민(弘敏)이었으나 의병장이 되면서 용기(龍起)로 개명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춘천군 이방(吏房)의 아전향리(衙前鄕吏)였다. 1896년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이소응의 춘천의병진에 참가하였고, 류인석의 제천의진으로 옮긴 후 류인석의진이 서북대행군 하자 낭천(狼川 : 華川)전투 때 잔류하여 줄곧 춘천·화천·양구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벌였다. 1907년 정미의병 당시 박선명(朴善明)·최영석(崔永錫)·박운선(朴雲善) 등과 기병하여 춘천·가평·지평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화천군 사내면(史內面 : 당시 춘천군)에서 8백여명의 독립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이어 동년 9월 춘천군으로 진입할 것을 계획하고 우선 가평군을 습격하여 군수 염규식(廉圭植) 등 10여명을 회유한 후, 경기·강원의 도계이며 춘천·가평의 군계인 싸리재를 넘어 춘천군 서면 방동(芳洞)에 대장소(이준용의 집)를 설치하는 동시에 380명의 의병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배신자 동민의 밀고를 받은 춘천주재 일본군 60여명이 동년 11월 3일 새벽 덕두원(德斗院) 방향에서 기습해 왔다. 이에 지용기 의병부대는 방동 뒷 골짜기 홍골과 사기맥에서 적과 치열한 혈전 끝에 겸전(鎌田) 대위 등 여러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였으나, 마침내 의병 20명이 생포되고, 지용기 역시 부하 14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때 생포된 의병 가운데 사내면 출신 소모장 정두용(鄭斗鎔)은 3년, 이춘삼(李春三)과 함인화(咸仁化)는 각 2년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한편 지용기 의병장의 부친인 지명재(池明在)도 아들을 따라 의병활동을 하다가 아들이 순사하자 숨어 살면서 비참한 일생을 마쳤다.

   정부에서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지은원(池恩源)

 

   1903(고종 광무 7)∼? 춘천 신동면 송암리(松岩里, 현 칠송동) 출신으로 기독교신자인 그는 서울 배화(培花)여학교 재학생이었다. 1920년 3·1운동 일주년이 되던 날 아침 여학생들이 기숙사에 태극기를 달아 놓고 기도와 찬송가를 부르며 기념식을 가졌다. 이 무렵 뒷산에서 만세소리가 들리자 그는 왕종순(王宗順, 철원출신), 윤경옥(尹璟玉, 춘천출신) 등과 더불어 뒷산으로 올라가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만세를 부르고 있던 학생들은 한수자(韓壽子, 화천출신)가 주동한 것이었다. 이에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출동하여 만세부른 학생들을 색출하였고, 결국 만세를 불렀던 학생 24명은 종로경찰서에 호출되어 1주일동안 모진 고문 끝에 송치됨으로써, 1920년 4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만세를 부른 학생 24명 전원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때 지은원(당 17세)은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형의 선고를 받았다.

 

 

circle03_darkblue.gif 차상찬(車相讚)

 

   1887(고종 24)∼1946. 춘천 신동면 송암리(松岩里, 현 칠송동) 출신으로, 호는 청오(靑吾)이다.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한때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1920년(당 33세) 때 개벽사에 입사하였고 다음 해에 주간(主幹)으로 취임 17년간 복직하였다. 이에 『개벽(開闢)』을 비롯하여 『별건곤(別乾坤)』『신여성(新女性)』『농민(農民)』『학생(學生)』 등 잡지의 언론인(기자)으로서 활약하였다. 또 그는 호(號) 이외에 수춘학인(壽春學人)·강촌생(江村生)·취운생(翠雲生)·월명산인(月明山人)·차천자(車賤者)·차돌이 등 필명을 사용한 시인·수필가로서 우리의 역사·유적·명승지에 관한 회고적인 글이 근간을 이루었다.

 

   특히 『개벽』신간호(1934)에 그가 게재한 <병신(1896)병란, 관동의병란비화(丙申兵亂關東義兵亂秘話)>는 강원도 의병사 연구에 기여하였으며, 그의 야담사화적인 저서로는 『조선사천년비사(朝鮮四千年秘史)』,『해동염사(海東艶史)』,『조선외교사(朝鮮外交史)』,『조선인명전(朝鮮人名傳)』,『한국야담사화전집(韓國野談史話全集)』등이 있다.

 

 

circle03_darkblue.gif 차주환(車柱環)

 

   1920∼? 춘천 춘천읍 화원정(花園町 : 현 樂園洞) 사람이다.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1937년 4월 동급생인 남궁태의 권유로 항일학생비밀결사인 상록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1938년 3월 졸업 후 서울에 있으면서 계속 상록회와 연결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1938년 가을에 상록회의 조직이 일경(日警)에 발각됨으로써 체포되었다. 이에 그는 1939년 12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범 위반형의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최영석(崔永錫)

 

   ?∼1907(순종 융희 1). 춘천 북내면의 유생이다.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일어나자 1907년 9월이래 박선명·지용기·박운선 등과 함께 3백여명의 의병을 모아 봉기하였다. 당시 그는 의병진의 소모장(召募將), 때로는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는 정찰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춘천 인람리(仁嵐里)에 이르러 박선명에게 글을 전하려고 하던 차에 춘천청찰고문지부 정찰대의 기습으로 체포되어 동년 10월 서울로 호송될 때 탈출을 시도하다가 피살되었다.

   정부에서 그의 공적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최천유(崔千有)

 

   ?∼1908(순종 융희 2). 춘천 북산외면 평민출신이다. 정미의병 당시 1907년 9월 박선명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최천유는 안종우(安鍾雨)·송관영(宋寬永)·김양현(金養鉉)·김순선(金順先) 등과 의병을 모아 그의 향리에서 봉기하였다. 그후 최천유는 의병 6백명을 거느리고 춘천·화천·양구·인제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1908년 1월 2일양구군 임당리 범동(林塘里 犯洞)에서 일본군(양구분견대 藤田소위부대)과 4시간동안 교전하여 이인금(李寅今) 이하 60여 의병이 전사하는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의병활동을 계속하던 그는 1908년 5월 양구군 진목정(眞木亭)에서 일본군에게 잡혀 피살되었다.

   정부에서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허기준(許基俊)

 

   1886(고종 23)∼1961. 춘천 동면 장학리(獐鶴里) 사람이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춘천의 천도교인들이 일으킨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춘천의 만세시위 계획은 천도교인 윤도순·박순교·이준용 등이 3월 중순부터 추진하였다. 그러나 윤도순이 각지를 돌면서 민중을 계몽 선동하다가 체포되어 계획이 잠시 중단되었다.

 

   이에 이준용·박순교 그리고 허기준이 재차 협의하여 3월 28일 춘천읍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작정하였다. 마침내 28일 태극기를 감추어 장터로 들어가서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수십명의 군중이 호응하는 가운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장터를 경계하고 있던 헌병보조원 허현(許鉉)도 총을 버리고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는데, 시위에 참가한 군중과 더불어 모두 체포되었다. 이에 허기준은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동년 6월 11일 청성복심원과 7월 17일 경성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허현(許鉉)

 

   1886(고종 23)∼1955. 춘천 출신으로 일본군 헌병보조원이었다. 1919년 3·1만세 시위 당시 춘천의 천도교인들이 일으킨 만세시위에 가담하였다. 춘천의 만세운동의 계획은 천도교인 윤도순·박순교·이준용 등이 3월 중순부터 추진하였는데, 윤도순이 각지로 순회하면서 민중을 계몽 선동하다가 체포되어 잠시 중단되었다.

 

   이에 이준용·박순교·허기준이 다시 협의하여 춘천읍 장날인 3월 28일로 시위일자를 결정하고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당일(28일) 태극기를 감추어 장터로 들어가서,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수십명의 군중이 호응하는 가운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허현은 헌병보조원으로 장터를 경계하고 있다가 총을 버리고 만세군중에 합류하여 일본군 수비대에게 체포될 때까지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동년 6월 11일 경성복심원과 7월 22일 경성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여 성적 불구자가 되었고 옥살이를 하였으며, 평생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

   정부에서는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춘천백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