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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

연표

인물2

지명연혁

지명유래

전설

 

춘천의 인물(삼국시대∼조선시대)


 Bullets008.gif삼국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之勝覽)』 춘천도호부의 건치연혁을 보면 "춘천은 본래 맥국(貊國)이며 신라 선덕왕 6년에 우수주(牛首州)로 되어 군주(軍主)를 두었고, 문무왕 13년에 수약주(首若州)로 칭하였다가 경덕왕이 삭주로 개칭하였고, 뒤에 광해주(光海州)로 불리웠다고 되었으며 고려 태조 23년에 춘주(春州)로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 춘천이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 이후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춘천은 선사시대의 유적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는데, 이로 미루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사회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춘천은 분지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가운데로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 또한 분지 내에는 우두벌이나 샘밭 등의 평야가 있어 천험(天險)과 수운(水運)을 갖춘 지형이다. 따라서 삼국시대에도 고구려나 백제·신라의 영토확장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의 온조왕 13년 사료에는 백제의 영토가 동으로 주양(走壤)에까지 이르렀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춘천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주양이 춘천으로 비정되는 학설은 백제초기의 영역관계와 관련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무시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또한 춘천지역이 고구려의 영토였음도 확인되는데 서면 방동리에 전형적인 고구려식 고분이 남아 있는 점과 삼국사기 지리지에 춘천을 비롯한 강원도 영서지방에 고구려식의 지명이 남아 있는 점에서 확인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문무왕이 춘천지역에 수약주를 설치하고 북방을 경비하기 위하여 주양성을 고쳐 쌓았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춘천은 그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사료에 등장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춘천과 관련된 인물은 신라의 진덕여왕 원년에 대아찬(大阿찬) 수승(守勝)을 우두주의 군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으며 효소왕 7년에 아찬 체원(體元)을 우두주의 총관(摠官)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다. 이들은 사료에서 확인되는 춘천과 관련된 최초의 지방관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죽지랑은 현존하는 신라 향가 가운데 '모죽지랑(慕竹旨郞)'이 있을 만큼 우리에게는 매우 친근한 화랑이다. 죽지랑은 효소왕대의 인물인데 그의 무리 가운데 있던 득오(得烏)가 죽지랑의 인품을 사모하여 지은 것이 바로 향가 모죽지랑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죽지랑은 그의 아버지인 술종공(述宗公)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 임지에서 낳은 것으로 되어 있는 점에서 지금의 춘천지방에서 태어나 아마도 어린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죽지랑이 태어난 설화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술종공이 임지로 가는 도중 죽지령(竹旨嶺, 오늘날의 竹嶺)에서 한 거사를 만나 서로 상대방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고 감동한 바가 있었다. 술종공이 삭주에 부임한지 한 달이 지나 그와 그의 아내가 꼭 같은 꿈을 꾸었는데 바로 그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지켜 알아보았더니 죽지령의 사람들이 거사가 죽은지 며칠 되었다고 하였다. 날짜를 알아보니 거사가 죽은 날과 꿈을 꾼 날이 일치하였다. 이에 술종공은 거사가 자기 집에 태어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이후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으니 아들이었다. 아기의 이름을 죽지(竹旨)라 지었는데 이는 그 거사와 만났던 죽지령과 연관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죽지랑과 같이 신라시대의 유명한 화랑으로 설원랑(薛原郞)을 들 수 있다. 설원랑은 신라화랑 가운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인데, 신라에는 화랑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원화(原花)가 존재했으나 그 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이 남자 중에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화랑으로 삼았다. 이때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 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였다. 그 때문에 명주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명주는 지금의 강릉의 옛 지명이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것을 고치고 착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명주에 세워진 것은 이곳이 설원랑과 연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신라의 화랑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죽지랑과 설원랑이 춘천과 강릉 등 강원도와 관련이 있음은 오늘날에도 되새겨 봄직하다.

 

 

 Bullets008.gif고려시대

 

circle03_darkblue.gif 신숭겸(申崇謙)

   광해주(光海州 : 춘천)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었다.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하였다. 궁예(弓裔) 말년에 기병대장(騎兵大將)이 되었다. 그런데 궁예의 폭정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죄없는 사람들이 빈번하게 죽임을 당하여 세상이 불안해지자 모두가 궁예를 증오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신숭겸은 기병대장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비밀회동을 통해 왕건(王建)을 왕으로 추대할 것을 모의하고 경명왕(景明王) 2년(918) 6월 을묘에 왕건의 집으로 찾아가 거사를 청하였다. 처음에 왕건은 장군들의 추대를 사양했으나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인해 거사를 결심하고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혁명을 일으키니 백성들도 이에 호응하여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가 고려 태조로 그는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年號)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고려 태조는 즉위 후 고려 건국의 공로자인 신숭겸·홍유·배현경·복지겸을 1등공신으로 삼고 금·은그릇과 비단옷·침구 등을 내려 공을 표창했는데 신숭겸은 고려 태조를 보필하면서 후삼국 통일을 위해 신명을 바쳤다. 태조 왕건은 918년 8월에 각처의 세력가들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후한 예물과 겸손한 언사로서 화친의 뜻을 보여 전쟁을 피하고자 했고,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와 후백제는 고려 태조가 즉위한 이후부터 7∼8년 동안 큰 충돌없이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태조 9년(926)에 견훤이 고려에 볼모로 보낸 진호(眞虎)가 병사(病死)한 것을 트집잡아 견훤이 고려를 공격함으로서 두 나라의 평화관계는 깨지고 치열한 교전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의 세력권인 안동(安東)으로 부터 상주(尙州)를 거쳐 협천(陜川 : 합천)·진주(晋州)에 이르는 낙동강 서부일대에 서 전선이 형성되어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 와중에서 후백제의 견훤은 태조 10년(927) 9월 신라의 경주에 침입하여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고려 태조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친히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대구 공산(公山)에서 견훤과 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전세가 태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결국은 견훤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기병대장으로 참여한 신숭겸 장군은 원보(元甫)·김락(金樂) 장군과 함께 힘을 다해 적과 싸워 태조를 단신으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태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동생 능길(能吉)과 철(鐵) 및 그의 아들 보락(甫樂)을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처럼 신숭겸 장군은 고려 건국의 1등공신일 뿐만 아니라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자신을 던져 태조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936년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을 이루고 역사의 장을 마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신장절공 묘역

 

 

circle03_darkblue.gif 견권(堅權)

   그는 능식 (能寔) · 권신(權愼 ) · 염상(廉湘 ) · 김락(金樂 ) · 연주(連珠 )· 마난(麻煖 ) 등과 함께 고려 건국의 2등공신으로 대조 때 춘주(春州)에 와서 진수(鎭守)하였다. 또한 태조 19년(936) 갑오(甲午)에 후백제와의 일리천(一利川) 전투시 기병 1만을 거느리고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circle03_darkblue.gif 왕유(王儒 : 王柔)

   광해주(光海州) 사람으로 원래 박유(朴儒)였으나 고려 태조로부터 왕성(王姓)을 하사받았다. 자(字)는 문행(文行)이다. 성격이 곧고 경서와 사기에 통달하였다. 그는 처음 궁예치하에서 벼슬에 나가 원외(員外)가 되었다가 동궁기실(東宮記室)에까지 이르렀으나 궁예의 폭정을 보고 집을 떠나 산 속에 은거하였다. 그 뒤 태조가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박유는 태조에게 귀의하였는데, 태조는 예(禮)로써 대하며 이르기를 "치리(致理)의 도(道)는 어진 사람을 구하는데 있는데, 지금 경이 온 것은 부암(傅巖)과 위빈(渭濱)의 선비를 얻은 것과 같다"고 하면서 관(冠)과 대(帶)를 주고 기요(機要)한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의 딸은 태조와 혼인하여 예화부인(禮和夫人)이 되었다. 박유의 현손(玄孫)으로 왕자지(王字之)가 있는데, 자(字)는 원장(元長)이고 처음 '이름은 소중(紹中)이었다. 서리(胥吏)로부터 시작해 참지정사(參知政事)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장순(章順)이라 하혔고 예종(睿宗)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circle03_darkblue.gif 이의(李의)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 문종(文宗) 22년(1068)에 춘주도(春州道) 감창사(監倉使)로 춘주에 부임하였다. 그는 이곳의 아름다운 경운산(慶雲山)에 매료되어 백암선원(白巖禪院) 옛터에 절을 짓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이자현(李資玄)

   자(字)는 진정(眞精)으로 이의의 장남(長男)이다. 용모가 장대하고 총명하며 민첩하였다. 그는 당시 고려 최고의 문벌귀족인 경원(인주)이씨 가문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경운산(慶雲山 : 춘주의 청평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자현은 그의 아버지가 지어 놓은 보현원(普賢院)을 수리하고 원명(院名)을 문수(文殊)로 고친 뒤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자현은 그가 이곳 경운산에 와 살면서부터 도적이 그치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자 산의 이름을 청평(淸平)으로 고쳤다. 그리고 그는 청평거사(淸平居士)라 자호(自號)하면서 참선을 낙(樂)으로 삼았다. 그는 고려 중기 불교계에 출현한 거사불교(居士佛敎)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자현은 청평산에 은둔하여 생활하는 동안 여러 차례 예종(叡宗)의 부름을 받았지만 계속 사양하다가 예종의 간청에 못이겨 잠시 삼각산(三角山) 청량사(淸 寺)에 머물렀다. 이때 예종이 사람의 성(性)을 기르는 요결(要訣)을 묻자 자현은 "과욕을 버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심요(心要)』1권을 저술하여 왕에게 올리는 등 주로 선종에 관심을 가졌다. 그 뒤 다시 문수원으로 돌아와 선(禪)과 수행에 몰두하면서 생활하다가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니, 인종(仁宗)은 진락(眞樂)이란 시호를 내렸다.

 

circle03_darkblue.gif 최약(崔약)

   최충(崔충)의 증손자(曾孫子)로 과거에 급제한 후 예종(睿宗)을 섬겼다. 예종은 사부(詞賦)를 숭상하고 놀이와 연회를 즐겨 일찍이 서경의 대동강(大同江)에서 시신(侍臣)들과 더불어 시를 짓고 화답하며 놀았다. 이때 지제고(知制誥)였던 최약은 왕을 수행하던 중 왕에게 "제왕은 마땅히 경서(經書)를 좋아하고 날마다 선비들과 더불어 경사(經史)를 토론하며 정치의 도리를 자문해야 하는데 시를 짓거나 경박한 문사들과 풍월을 옳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라고 간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 춘주부사(春州府使)로 좌천(左遷)되어 부임했다. 후에 그는 잘못을 뉘우치는 시를 지었는데 왕이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 그 뒤 관직이 예부상서(禮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circle03_darkblue.gif 김인규(金仁揆)

   광국동덕익성공신(匡國同德翼聖功臣) 김경용(金景庸)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좌승선(左承宣)·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했고, 예종(睿宗) 때에 지주사(知奏事)로 승진된 후 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자겸(李資謙)의 아들 이지언(李之彦)에게 그의 딸을 출가시킨 일로 인하여 이자겸이 몰락하자 춘주사(春州事)로 강직되었다. 그후 소환되어 수사공좌복야참지정사(守司空左僕射參知政事)로 있다가 생을 마쳤다. 그는 사람됨이 관대하고 후(厚)하여 사람 평판하는 것을 싫어했다. 또 권세를 믿고 남에게 교만하지 않았다 한다.

 

circle03_darkblue.gif 조효립(曺孝立)

   고종(高宗) 40년(1253) 8월말에 몽고병이 춘주성(春州城)을 포위하고 공격할 때 문학(文學)으로서 안찰사(按察使) 박천기(朴天器)와 함께 춘주성을 방어하고 있었다. 몽고병은 처음에 사람을 보내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안찰사 박천기, 문학 조효립등은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하였다. 9월 초순부터 몽고병은 춘주성을 겹겹이 포위한 뒤 목책(木柵)을 2중으로 세우고 그 둘레에 깊이가 한길이 넘는 참호를 파놓아 춘주성을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지경에 빠지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날을 공격하니 성안에는 샘과 우물이 모두 말라 말과 소의 피를 내어 마셨다. 군졸들의 피로가 극에 달하자 조효립은 성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그의 처와 함께 불속에 뛰어 들어 자살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박천기(朴天器)

   고종 40년(1253) 8월말에 몽고병이 춘주성(春州城)을 포위하고 공격할 때 춘주도(春州道)의 안찰사(按察使)로서 춘주와 인근지역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춘주성을 방어하고 있었다. 몽고병이 항복을 요구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항전의 뜻을 굳혔다. 9월 초순부터 몽고병은 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목책(木柵)을 이중으로 세운 뒤 그 둘레에 참호를 파놓았다. 그리고 여러 날을 공격해 고려군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갔다. 군량과 방어용 시석(矢石)도 바닥이 났고, 성안의 우물도 모두 말라 말과 소의 피를 내어 마시는 상황에 놓였다. 박천기는 더 이상 대책도 없고 지킬 힘도 없었다. 그리하여 성안의 재물과 양곡을 불사르고, 9월 중순에 600여명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성밖으로 나가 목책을 파괴하고 포위망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참호에 가로막혀 나가지 못하였다. 결국 한 사람도 탈출하지 못하고 박천기를 비롯한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춘주성을 함락시킨 몽고병은 최후까지 저항하는 성내의 군민을 모조리 살륙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박항(朴恒)

   춘주(春州)의 아전으로 자(字)는 혁지(革之), 처음 이름은 동보(東甫)였다. 그는 총명하고 지혜가 많았으며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박항은 고종(高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서울(개경)에 머물러 있다가 몽고병에 의해 춘주성이 함락되고 성민들이 도륙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춘주로 달려와 부모의 시신을 찾았다. 성 밑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부모가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지 못하자 그는 용모가 비슷한 사람들은 모두 거두어 묻었는데 그 수가 300여인이나 되었다. 그 뒤 박항은 어머니가 포로로 잡혀가 연경(燕京)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번이나 가서 구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한림원(翰林院)에 있다가 충주(忠州)의 수령으로 나갔는데 치적이 뛰어났다. 이어 우정언(右正言)으로 임명되었고, 경상·전라2도(道)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명성을 얻고 공적을 쌓았다. 충렬왕(忠烈王) 때는 승선(承宣)이 되어 관리의 인사문제를 맡아보았다는데 이전에는 정방(政房)의 전주(銓注)를 맡은 관리들이 집에서 잠을 자므로 만나기를 바라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나 박항은 전주를 끝낸 후에 집으로 감으로써 이후 이것이 관례로 되었다. 원(元)의 세조(世祖)는 일본정벌을 위해 필요한 전함·군량미·병장기 등을 고려로 하여금 조달케 하고 원수(元帥) 흔도( 都), 우승(右丞) 홍다구(洪茶丘)를 보내 감독케 하였다. 고려에서는 군신(君臣)이 모두 이들에게 복종할 뿐 거역하지 못하였는데 박항은 왕에게 권하여 구체적 실정을 원나라에 보고토록 해 혼도 등이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정벌에 필요한 후방물자를 보내는 방책과 군사기밀에 관한 조치들을 내었다.

   그는 충렬왕(忠烈王) 7년(1281) 그의 나이 55세로 생을 마쳤는데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문장에 능했고 사람됨이 관대하고 후하여 남을 잘 접대하였으며 또한 실무에도 능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유능함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박원굉(朴元굉: 후에 광정으로 고침)은 금부(金符)를 받고 부만호(副萬戶)가 되었다.

 

circle03_darkblue.gif 정지린(鄭至麟)

   몽고침략시 춘주방호별감(春州防護別監)으로 춘주성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고종 40년(1253) 10월 기유에 양근성(楊根城) 방호별감으로 있다가 몽고병에게 투항한 윤춘(尹椿)이 정지린에게 글을 보내 투항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의 수비를 더욱 견고하게 하여 몽고병으로 하여금 포위를 풀고 물러가게 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우석(禹碩)

  충숙왕(忠肅王) 때 풍산군(豊山君)에 봉해진 우산절(禹山節)의 부친으로 충선왕(忠宣王) 때 춘주부사(春州府使)로 임명되었다. 이때 양현고(養賢庫) 자섬사(資贍司) 및 여러 궁사(宮司)에게 은(銀)을 차등있게 내도록 하여 우석에게 노자(路資)로 주었다.

 

circle03_darkblue.gif 강창서(姜彰瑞)

  희종(熙宗)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에서 춘주의 수령이 되었다.

 

circle03_darkblue.gif 최유공(崔愈恭)

   고종(高宗) 2년(1215) 9월 임오(壬午)에 동계(東界) 겸 춘주도(春州道) 방호사(防護使)로 임명되었다.

 

circle03_darkblue.gif 이첨(李詹)

   우왕(禑王) 때 우헌납(右獻納)이었던 그는 좌정언(左正言) 전백영(全伯英)과 함께 소(疏)를 올려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을 탄핵하려다 지춘주사(知春州事)로 강직되었다. 그뒤 무고한 재상을 탄핵했다 하여 곤장을 맞고 유형(流刑)에 처해졌다.

 

circle03_darkblue.gif 손원적(孫元迪)

   우왕(禑王) 5년(1379) 우왕의 유모 장씨(張氏)사건으로 장씨의 양녀(養女)를 아내로 맞이한 상호군(上護軍) 손원미(孫元美)는 죽임을 당했고,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있던 그의 형 손원적은 곤장을 맞고 유형(流刑)에 처해졌다.

 

circle03_darkblue.gif 민제(閔霽)

   자(字)는 중회(仲晦)로 공민왕(恭愍王) 때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진 민변(閔변)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고 국자직학(國子直學)에 보임되었다가 춘주검열(春州檢閱)로 선발되었다. 그뒤 전리정랑(典理正郞)·지제교(知製敎)·성균사예(成均司藝)·전교부령(典校副令) 등을 역임했다. 우왕(禑王) 때에 판전의사(判典儀事)가 되었다가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춘주에 부임하여 어진 정치를 베풀고 다시 판소부시사(判少府시事)·전공·예의판서(典工·禮儀判書)로 전임되었다.  창왕(昌王)때에는 개성윤(開城尹)·상의밀직사사(商議密直司事)에 임명되었고 공양왕(恭讓王) 원년(1389) 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다가 첨서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전직되었다. 그는 어릴적부터 예(禮)를 아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었고 이단(異端)과 음사(淫祀)를 배격하였다.

 

 

Bullets008.gif조선시대

 

circle03_darkblue.gif 반경량(潘慶良)

   맹손(孟孫)의 아들로 선조대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어모장군(禦侮將軍)·충무위부호군(忠武衛副護軍)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군수로 나갔다가 순사(殉死)하였다. 원주에서 지금의 동내면 신촌리(新村里)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circle03_darkblue.gif 윤제언(尹齊언)

   본관(本貫)은 파평(坡平),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김손(金孫)의 증손으로 관이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에 이르렀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으나 병자호란때 강도(江都)에서 순절하였다. 『조선환여승람(朝鮮 輿勝覽)』에 춘천의 충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circle03_darkblue.gif 지득용(池得龍)

   본관은 충주, 무과에 급제하여 삭주방어사(朔州防禦使)를 지냈다. 인조대의 정묘호란 때 의주(義州)에서 전사하였다. 『춘천읍지(春川邑誌)』全(규장각도서 17525), 『(朝鮮 輿勝覽』에 춘천의 충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circle03_darkblue.gif 지응규(池應奎)

   본관은 충주, 자는 응섭(應涉), 선의공(宣懿公) 경(鏡)의 후손. 임진왜란 당시 신립(申砬)과 함께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朝鮮 輿勝覽』에 춘천의 충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계사(繼泗)는 병자호란 때 오성위판(五聖位版)을 모시고 대룡산으로 피신하여 위판을 보전하였다.

 

circle03_darkblue.gif 한백록(韓百祿)

   조선중기 무신으로 춘천 출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수지(綏之)이다. 선조 13년(1580) 알성무과(謁聖武科)에 합격, 진잠현감(鎭岑縣監)을 거쳐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에서 옥포해전(玉浦海戰)에 주역을 담당하고 부산첨사(釜山僉使)에 제수(除授)되었다. 1592년 7월 17일 역전(力戰)하다가 부산포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선조 때 녹훈이등(錄勳二等), 인조 때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 영조 27년(1751)에 정려(旌閭)되었고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로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묘가 춘천시 서면 금산3리에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 춘천의 충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춘천백년사>

 

*原典(춘천백년사)에는 조선시대 효·열행(孝·烈行)자가 많이 수록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였다.